‘목이 조여져 숨진 여성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속옷으로 입이 틀어막혀 있다. 손을 묶은 매듭은 피해자가 신던 스타킹을 꼬아 즉석에서 만든 것이다. 사체는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감춰졌다. 넓은 논의 배수로, 콘크리트관….’
10건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두 다 저질렀다고 자백한 이춘재(56·사진)의 ‘시그니처’ 행동이다. 시그니처 행동이란 범인만이 행할 수 있는 범행수법을 지칭한다. 화성사건에서 이춘재의 ‘시그니처’가 없는 것은 8차 사건뿐이었다.
1988년 9월 발생한 이 사건은 이듬해 윤모(당시 22세)씨가 범인으로 검거되면서 모방범죄로 결론났었다.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 자신의 집에서 혼자 잠을 자던 박모(13)양을 성폭행한 뒤 목을 졸라 살해한 사건이다.
여기까진 이춘재의 범행과 유사하다. 그러나 박양 시신은 입이 틀어막히거나 손이 묶여 있지 않았고, 살해된 현장인 집 방안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윤씨는 시신에서 나온 음모와 혈액형이 같다는 이유로 검거돼 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그런데 6일 경기남부경찰청 장기미제수사팀에 따르면 이춘재는 프로파일러와의 대면조사에서 “그 사건도 내가 한 일”이라고 자백했다. “모방범죄라는 건 택도 없는 소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일단 이 자백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사건기록과 증거를 찾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엉뚱한 영웅심리에 젖어 다른 사건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는 ‘거짓 진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춘재는 1992년 결혼해 살던 충북 청주에서도 처제 살해 이외의 2건의 추가 살인을 자백한 것으로 전해졌다. 91년 1월 27일 오전 11시쯤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콘크리트관에서 방적공장 직원 박모(당시 17세)양이 속옷으로 입이 틀어막히고 손이 뒤로 묶여 숨진 채 발견됐던 사건과 92년 가정주부 이모(당시 28세)씨 피살사건이다.
박양 사체가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손발이 묶여 발견된 점은 이춘재의 시그니처 행동으로 볼 수 있지만, 주택 방에서 전화줄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된 이씨 사건은 이런 시그니처 행동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8차 사건과 그외 9건의 사건이 다른 화성사건과 같은 양상인 셈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경찰은 이들 사건 모두 이춘재가 저질렀을 개연성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았을 때나 인적이 드문 길가나 공터, 논, 공사장 근처에서는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한 뒤 목졸라 살해하고, 속옷으로 묶고 재갈을 물려 시신을 은폐했지만, 주택가에선 급하게 범행하고 시신을 방치한 채 도주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방식 모두가 이춘재의 잔혹한 범행 ‘시그니처’일 수 있는 셈이다.
경찰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춘재가 자백한 사건들 모두 자신이 거주하던 인근에서 벌어졌던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연쇄살인범은 자신의 거주지에서 반경 3㎞ 이내에서 연이어 범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소개했다.
한편 이춘재의 천연덕스러움은 수사팀과 프로파일러들까지 경악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감된 부산교도소로 대면조사차 찾아간 여성 프로파일러에게 “손이 참 이쁘시네요, 손 좀 잡아봐도 되나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