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런 날이 와 내가 한 짓이 드러날 줄 알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춘재(56·사진)가 화성사건뿐 아니라 다른 살인과 강간, 강간미수사건까지 털어놓으면서 던진 말이다.
경찰의 접견 조사가 시작된 초기만 해도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그가 이처럼 스스로 자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증거물에서 새롭게 검출된 DNA였다. 자신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이 DNA 앞에 그는 담담한 태도로 “증거가 나왔으니 할 수 없네요”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8차 사건을 제외한 화성사건의 9차례 살인뿐 아니라 다른 5번의 살인, 성범죄 30여건을 자신의 입으로 진술하자 조사를 맡은 경찰관들조차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부 사건은 자신이 범행을 저지른 장소까지 그림을 그리며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감 중인 부산교도소를 찾아가 원정 대면조사에 나섰던 경찰의 신문 전략은 ‘범인과의 깊은 라포르(신뢰관계)’였다. 라포르는 범인의 현재 심리와 범행 당시 심리, 그리고 범행 동기에 대해 이해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범인이 조사자와의 정신적·감정적 교감상태에 이르는 것을 칭한다. 이러한 라포르를 바탕으로 스스로 범행을 자백할 수 있는 정신상태로 진전시키는 일이 프로파일러들이 맡은 역할이다.
이춘재는 이 같은 경찰의 고도의 전략 덕분에 화성사건뿐 아니라 나머지 다른 사건들도 물 흐르듯 스스로 털어놓은 것으로 분석된다. 라포르가 형성된 상태에서 5, 7, 9차 사건의 DNA뿐 아니라 나머지 사건의 DNA 분석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부인해도 결국 다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해석이다.
경찰은 지난주 국과수로부터 4차 사건 증거물에서 검출된 DNA도 이춘재의 것과 일치한다는 내용을 전달받았으나, 이춘재는 4차 사건 감정 결과를 전달받기 전에 이미 심리적 방어벽이 무너지면서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2일 브리핑에서 “라포르가 형성된 상황에서 이춘재가 지난주부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임의로 자백하기 시작했다”며 “본인이 살인은 몇 건, 강간은 몇 건이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춘재가 자백했지만 오래전 기억에 의한 자백인 만큼 당시 수사기록 등을 토대로 자백의 신빙성을 검증하고 있다. 이춘재는 1994년 1월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부산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 중이다.
수원=강희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