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악마를 보았다… 44명 지켜주지 못했던 정부를 보았다

입력 2019-10-03 04:05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 30년 전에 저지른 그 많은 범행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화성연쇄살인의 범인임을 자백한 이춘재는 44건이 넘는 범행을 자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술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범행 장소의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다. 다른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예전 살인 현장에 가서 눈을 감고 회상하면 즐거워졌다”고 말했듯이 그도 ‘살인의 추억’을 오래도록 곱씹어온 듯하다. 이춘재의 범행은 모방범죄를 제외한 화성연쇄살인 9건, 연쇄살인 리스트에서 빠져 있던 화성·청주 일대의 살인 5건, 이와 별개인 강간 및 강간미수 30여건으로 구성돼 있다. 군에서 제대한 1986년 1월부터 처제 살해로 구속된 1994년 1월까지 벌인 짓이다. 중간에 강도예비 혐의로 6개월여 수감됐던 기간을 빼면 두 달 남짓에 한 번꼴로 강간이나 살인을 저질렀다. 대상은 저항력이 약한 여성이었고, 갈수록 더 강한 자극을 쫓아다닌 듯 강간이 살인으로, 다시 연쇄살인으로, 결국 인척살인으로 이어졌다. 흉기를 쓰지 않았다. 목을 조르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했고, 평범한 살인에 만족할 수 없었는지 후반부의 범행에선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경우가 많았다. 3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화성연쇄살인범. 그의 기억이 재구성한 살인과 강간의 목록에서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

44건이 넘는 범행은 44명이 넘는 살인과 강간 피해자가 있음을 뜻한다. 이춘재가 추억처럼 간직해 온 그 일을 피해자와 유족은 응어리진 한으로 삼켜야 했고, 어떻게든 잊고 살아보려 발버둥 쳐야 했을 것이다. 30년이 지난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범인을 찾아낸 경찰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8년 동안 44건이 넘게 이어진 범행을 막아내지 못했던 수사당국의 실패, 단 한 명의 무도한 범죄자로부터 많은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했던 정부의 실패가 덮어질 순 없다. 조사가 마무리되면 경찰과 정부의 책임 있는 이들이 피해자와 유족들을 찾아가기 바란다. 미궁에 빠졌던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지금도 응어리져 있을 반인륜 범죄의 실상이 이렇게 됐던 것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그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제 당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는 없도록 하겠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