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이하 유엔 아동위) 5, 6차 국가본심의가 열렸다. 한국이 1991년 비준한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자리다. 강원도 평창에 사는 중학생 손승하(14)양과 경남 통영에 사는 이은민(13)양이 한국 아동·청소년으로서는 유일하게 회의에 참석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학생은 지친 기색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이양은 이틀 뒤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었고, 3학년인 손양은 밀린 수행평가를 하느라 1주일을 정신없이 보냈다고 했다. 손양은 “밀린 숙제를 간신히 마치고 어제 진이 빠져서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이게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유엔에서 보고 들었던 아동의 권리에 관한 얘기가 딴 세상 얘기인 게 새삼 느껴졌다”고 말했다.
동문서답하는 어른들
정부는 이번 심의에 보건복지부 차관을 단장으로 법무부 여성가족부 환경부 등 부처의 담당자 약 30명을 대표단으로 보냈다. 8년 전 3, 4차 심의에 비해 무게감을 대폭 늘린 구성이다. 정부는 심의에 앞서 이행보고서를 제출할 때부터 지지부진한 아동권리 개선 상황을 부풀려 보고한다는 의심을 받았다(국민일보 9월 3일자 12면 보도). 유엔 아동위원들은 5, 6차 심의에서 한국 정부의 미진한 정책과 답변을 잇따라 지적했다. 두 학생은 회의장에 앉아 통역의 도움으로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학생들 눈에도 정부의 답변은 궁색하거나 동문서답인 경우가 많았다. 체벌 문제에 관심이 많아 관련 질문과 답변을 유심히 지켜봤다는 이양은 “유엔 위원이 ‘아동들에게 간접 체벌이 이뤄지고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정부 쪽에서는 ‘(교사들에게) 체벌 대신 징계권을 부여한다’고 답했다”고 기억했다. 이양은 “유엔 위원이 ‘징계권 역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하니 정부 쪽에선 ‘징계권 대신 순화된 다른 표현을 쓰겠다”고 답했다”면서 “질문과 전혀 다른 답을 하길래 왜 저러나 싶었다”고 덧붙였다.
손양은 “질문 중 ‘한국은 무상교육의 본분을 포기하는 거냐’고 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사교육이 너무 심한 걸 지적한 질문이었다”면서 “공감이 갔지만 정부 쪽에서는 정확한 답변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손양은 “정부 쪽에서 그나마 자신있게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했는데 유엔 위원은 ‘교육 상황이 이런데 한국을 포용국가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고 되짚었다. 포용국가 아동정책은 지난 5월 정부가 아동에 대한 국가 책임 확대를 목표로 발표한 종합 대책이다.
두 사람은 정부의 답변이 대부분 ‘확대할 방침’ ‘검토할 계획’ 등 추상적인 수준이었다고 꼬집었다. 손양은 “유엔 위원이 한국에서 압박이 얼마나 심하면 이렇게 아동들이 자살을 많이 하느냐고 물었다”면서 “정부 답변을 유심히 들었는데 결국 ‘이러이러한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내용뿐이라 실망스러웠다. 본인들이 하고 있는 게 결과적으로 아무 소용 없다는 얘기 아닌가”라고 말했다. 일정을 함께한 이혜진 한국아동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대표단에 정책 결정권자가 없어 담당자들의 답변 범위에 한계가 있어 보였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손양과 이양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동권리 관련 활동을 해왔다. 국내 아동단체 연합체인 한국아동단체협의회 주관 ‘대한민국 아동총회’(이하 아동총회)에 참여하면서다. 아동총회는 김대중정부 시절인 2002년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청소년들의 제안으로 2004년 시작돼 지난 8월 대회까지 16차례 열렸다. 아동·청소년들은 그간 총회에서 결의안 100여개를 채택했다. 이 중에는 유엔이 지적해온 아동 문제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두 학생은 당사자로서 아동의 권리를 배우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고 입을 모았다. 유엔 심의에서 많은 걸 보고 들었지만 다녀와서 관련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던 이유도 그래서다. 손양은 “또래 친구들은 아동권리 문제를 이야기해도 관심이 없거나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슨 활동을 하고 왔는지 알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양 역시 “당사자인 주변 친구들보다 오히려 선생님들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오, 유럽 다녀왔다며’ 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혜진 사무총장은 “한국에서 보통 아이들은 공부나 학교생활에 매몰돼 스스로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게 어렵다”면서 “유엔 심의 중에도 학교 교육과정에 인권 교육이 제대로 들어 있느냐는 질문이 나왔다”고 덧붙였다. 이양은 “저 역시 아동총회 활동을 하며 배운 것들 때문에 아동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주변 친구들은 알 방법이 없고 어른들이 잘 알려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두 학생은 한국에서 아동·청소년을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미성숙하고 지도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게 이런 현실을 만든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양은 “아동들에게도 어른에게 없는, 아동만이 가질 수 있는 관점이나 시각이 있는데 어른들은 그런 건 무시한 채 의견을 제시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손양은 “일례로 자유학기제처럼 좋은 취지에서 실시된 정책도 일방적으로 시행하니 커리큘럼도 제멋대로이고 실제로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무조건 아동은 판단을 제대로 못할 거란 시각이 문제”라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