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 경천대, 아침 안개 헤치고 황금 들녘 달리는 가을 기차

입력 2019-10-02 18:21
경북 김천으로 향하는 경북선 무궁화 열차가 희뿌연 아침 안개를 뚫고 상주시 청리면 일대 황금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노랗게 익어가는 벼와 허수아비가 가을 정취를 더하고 있다.

경북 상주는 신라의 수도 경주와 함께 경상도의 명칭에 포함됐다. 낙동강을 젖줄로 하는 너른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곡식 등 물자가 풍부했던 덕분이다. 1300리 낙동강이 적시는 여러 지역 가운데 유일하게 ‘낙동’이란 지명을 가진 곳이 상주다. 굽이치는 낙동강과 탁 트인 황금 들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부자가 된다.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낙동강이 빚어놓은 경치 중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상주시 사벌면 경천대 국민관광지다. 먼저 대표 경관인 경천대로 향한다. 솔숲 그늘에 이어진 길을 10분 남짓 걸으면 무우정(舞雩亭)이 반긴다. 병자호란 당시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수행한 당대의 석학 우담 채득기 선생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무우정 근처에 집을 짓고 은거했다. 이곳에서 경천대 오르는 길에 우담 선생이 사용했다는 돌그릇 세 개가 놓여 있다. 동그란 것은 연을 키우던 것, 가운데는 세수하던 것, 큰 네모는 약물을 제조하던 용도라고 전한다. ‘하늘이 스스로 만들었다’는 의미의 자천대(自天臺)라고 하던 것을 우담 선생이 ‘하늘을 떠받든다’는 의미로 경천대(擎天臺)라고 불렀다.

사벌면 경천대 전망대에서 본 낙동강과 회상리 들녘.

돌 틈 사이 계단을 딛고 경천대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지는 전망에 가슴까지 뻥 뚫린다. 한쪽은 낙동강이 휘돌아 나가면서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고, 건너편엔 흙이 반달 모양으로 쌓여 너른 들을 이루고 있다. 강줄기를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산자락이 강 쪽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있다. 용머리 같다고 하여 용바위라 불린다.

투박한 돌덩어리 사이 갈색으로 변한 경천대 소나무.

경천대는 투박한 돌기둥과 돌덩어리를 대충 쌓아놓은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시멘트에 굵은 자갈을 버무려놓은 듯한 모양의 역암(礫巖)이 독특하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한 그루가 풍경을 완성한다. 하지만 푸른색을 띠고 있는 주변의 소나무와 달리 갈색으로 변해 있다. 수액을 맞으며 버티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사진 찍기 좋은 명소를 지나 정상에 오르면 3층 규모의 전망대가 다가온다. 용바위와 경천대, 회상리 들녘, 경천섬 등 사방을 일망무제로 둘러볼 수 있다. 강 건너 회상리 들녘이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시원한 풍광은 낙동면 낙동리에 있는 나각산(螺角山)에서도 볼 수 있다. 산 모양이 소라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240m에 불과하지만 높이가 낮다고 풍경까지 낮지는 않다. 수백 수천m 되는 높은 산에서 보는 경치 못지않다.

낙동면 낙동리 나각산 정상 인근의 출렁다리.

들판의 곡식이 익을 때면 유명세를 치르는 곳이 있다. 청리면 청리교 기찻길이다. 기차가 지나는 길옆 황금 들녘과 허수아비가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보여준다. 전국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이유다. 면 소재지에서 가천리 방향에 위치한 고가도로에서 열차 통과시간에 맞춰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일제히 울린다.

오전 7시 35분 청리역을 출발한 김천행 열차가 건널목에 가까워지면 신호가 울려 퍼진다. 곧 희뿌연 안개속에서 ‘은하철도’처럼 열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사진을 찍는 시간은 고작 몇 초. 열차는 순식간에 고가도로 밑을 지나 모습을 감춘다. 맑은 날에는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 아래 노란 들판 사이를 내달리는 열차를 담을 수 있다.

드론으로 촬영한 낙동면 ‘용포리 다락논’.

낙동면 ‘용포리 다락논’(다랑논)도 인기다. 밭과 논이 산자락을 따라 빼곡히 조성돼 절경을 이룬다. ‘다락논 녹색길’을 따라 논 사이를 거닐어 갑장산(806m) 기슭에 세워진 ‘갑장루 전망대’에 오르면 층층이 황금 계단을 이룬 가을 들녘을 광활하게 바라볼 수 있다. 주변 수정리, 비룡리, 승곡리, 유곡리, 신오리, 상촌리 모두 황금 들판을 이룬다.

▒ 여행메모
‘청리 기찻길’ 열차 운행시간 확인 필수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자전거박물관


수도권에서 상주 경천대로 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나들목에서 빠지면 된다. 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다 세천교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가다가 덕담교를 건너 좌회전한 뒤 사벌면 소재지를 지나 묵하리에서 우회전한다. 기찻길 촬영지인 청리교는 당진영덕고속도로 남상주나들목에서 나가면 가깝다. ‘용포리 다락논’(다랑논)은 중부내륙고속도로 낙동분기점에서 김천분기점 방향으로 3분가량 달리면 오른쪽으로 보인다. 낙동분기점 직전 상주나들목에서 나가면 된다.

청리역에서 김천 방면으로 가는 열차는 오전 7시35분, 9시25분, 낮 12시35분, 오후 4시4분, 6시4분 출발한다. 예정 시간보다 늦는 경우도 있지만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다.

자전거박물관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해 민족의 자긍심을 세웠던 엄복동 선수를 볼 수 있다.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의 실존 인물이다. 문장대, 함창 아트로드, 상주공검지, 명주박물관, 도남서원, 상주박물관, 경천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상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전문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