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방아쇠’가 됐는지 모른다. 먼 나라 얘기 같았는데, 이제 코앞에서 벌어진 현실이 됐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으로 파고들었고, 참혹한 결과물을 남기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이 처음으로 이름을 얻고 기록을 남긴 건 대략 1920년대다. 그 전부터 있었던 질병인지, 흔히 ‘돼지콜레라’라고 부르는 일반 돼지열병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거듭해 생긴 건지 알지 못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사하라사막 남쪽 지역에서 잇따라 발병해 일종의 풍토병으로 여겨졌다. 이 즈음은 서구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작업이 완료된 때였다. 야생 멧돼지 사이에서 맴돌던 바이러스가 유럽에서 들여온 돼지를 매개체로 삼아 증식하고 변형하며 세력을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 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1960년대 스페인 포르투갈로 퍼졌고 유럽을 차근차근 공략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2016년 몰도바를 시작으로 체코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으로 세력권을 키웠다. 아시아로 넘어오면서 베트남 중국 몽골 필리핀 한국 등을 휩쓸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과 그 속에 들어 있는 핵산(DNA 또는 RNA)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의 입자다. 스스로 대사 활동을 못하기 때문에 무생물로 본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동물이나 식물의 세포에 침입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세포에 기생하면서 자신을 복제하고 증식한다. 복제한 바이러스를 세포 밖으로 내보내면서 숙주는 죽게 된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생명체라고도 할 수 있다.
2015년 한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1918~19년 5000만명을 죽음으로 내몬 스페인독감, 100만명을 숨지게 한 1957년 아시아독감, 에볼라·사스·지카…. 모두 바이러스가 일으킨 재앙이다. 스페인독감을 유발한 병원체는 2005년에야 밝혀졌다. 정체는 조류인플루엔자에서 파생한 바이러스였다.
사실 인류는 바이러스를 막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평생 330번을 걸린다고 하는 감기도 바이러스의 작품이다.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 종류는 200여 가지에 이르고, 백신도 치료제도 없다. 돼지과 동물만 공격하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도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이러스가 5000여종에 이르는데, 인류가 모르는 바이러스가 더 많다. 10~40년 주기로 변형되는 데다 최근 들어 인간과 동물을 넘나드는 바이러스도 출현한다.
바이러스에 따른 가축 질병은 인류의 탐욕이 빚은 비극이기도 하다. ‘더 많은 단백질(고기)을 빠르고 싸게’라는 욕망은 공장식 축산을 잉태했다. 좁은 공간에 가축을 밀집해 키우다 보니 사육 환경이 나쁘고 감염병에 취약하다. 한국은 2000년부터 구제역, 2003년부터 조류인플루엔자에 시달리는 중이다. 연례행사처럼 찾아와 축산 농가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2010~2011년 구제역이 대유행했을 때 280만여 마리에 이르는 소, 돼지 등을 땅에 묻어야 했다.
물론 세계화에 따라 인구 이동 규모가 커지고, 해외를 제집 드나들듯 하면서 여러 감염병이 널리 퍼지는 일이 잦다. 그렇다고 공장식 축산의 맹점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해마다 살처분으로 엄청난 수의 가축을 땅에 묻고, 수많은 축산 농가가 반복해서 고통을 겪는 일이 정상은 아니다. 근본 대책을 만들지 않으면 21조원 규모로 성장한 한국 축산업의 뿌리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더욱이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창궐하면서 국제 육류 가격이 요동치고 있다. 세계 최대 돼지고기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이 각국의 돼지고기를 빨아들이면 우리 식탁에서 돼지고기 구경하기 힘든 날이 올 수도 있다.
당장은 방역과 차단이 시급하다. 다만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친환경 축산’ ‘동물복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동물복지는 선택이 아니라 미래의 식탁과 환경, 생존을 보장할 버팀목일지 모른다.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