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16장 24절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자기 관리를 위해 부정해야 할 것을 부정하고 들어올려야 할 것을 들어 올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제자이면서 분석심리학 학파를 이룬 칼 융은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면서 인간 안에 내재돼 대립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에고(EGO)와 셀프(SELF)라는 개념이다. 에고는 자아라 번역하고 셀프는 자기라고 번역한다. 융에 따르면 에고란 세상, 혹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자아다. 에고는 항상 자신을 확장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냉철하고 이기적인 성질을 가졌다. 에고로 인해 자기 보존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에고가 너무 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자기 확장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희생시키기도 한다. 반면 셀프는 세상과 사회 그리고 타인과 동시에 이성과 감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성격을 지녔다. 나와 타인을 분리해 나만 챙기려는 이기적 본성이 아니다. 나와 이웃을 하나로 이해한다. 타인을 자신처럼 수용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금욕과 절제를 상식으로 여겼다. 금식하며 절약한 돈으로는 고아와 과부를 구제했다. 윤리와 도덕, 율법도 철두철미하게 지키며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마 우리가 그들을 봤다면 엄격함과 절제된 도덕성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더러운 위선자라고 저주까지 했다. 그들에게 자기 관리란 에고의 영역이었다. 자기를 드러내고 확장하려는 욕망을 거짓으로 포장한 것이었다. 잘못된 자기 관리의 전형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관리의 본질을 말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구절에서는 우선 자기를 부인하라고 권하신다. 첫 번째 자기는 소유격이다. 자기가 가진 무엇인가를 부정하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할 때는 자기가 재귀 대명사로 사용됐다. 이는 본래 자기의 모습을 말한다. 이기적인 모든 것을 버리라는 의미다. 이 말씀이 에고와 셀프를 보여준다고 본다. 에고는 소유대명사이고 셀프는 재귀대명사다. 에고는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 만들어진 자기, 무엇인가를 소유해 자기를 확장하려는 이기적인 자신이다.
예수님은 거짓된 에고를 부정하라고 요구하셨다. 셀프란 참된 자기를 말한다. 예수님과 하나 되고 싶어 하는 순수한 ‘나 자신’이며, 나와 이웃을 하나로 끌어안고 사랑하려는 참된 본성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빚으신 인간의 원형이기도 하다. 본래 형상을 짊어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주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 안에 거하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법과, 악을 행하기 원하는 죄의 법이 싸우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의 법이 자기가 아닐까. 예수님을 따르려는 참된 나의 모습이다. 죄의 법은 예수님께서 부정하라고 명령하신 에고다.
자기 관리란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들어 올릴 것인지를 아는 걸 말한다. 현대인은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들어올려야 하는지 구분 짓지 않는다. 부정해야 할 것을 들어 올리고, 들어올려야 할 것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성공과 자기, 물질 중심으로 산다. 결국, 부정해야 할 에고를 들어 올리고 반대로 들어올려야 할 셀프를 부정하며 사는 것이다. 셀프를 부정하고 에고를 들어 올리는 사람은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로 볼 수 있다. 그 반대여야 한다.
에고를 부정하고 셀프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 제자다. 에고를 죽이고, 셀프를 살려야 이 시대의 사도가 된다. 오늘도 부정해야 할 것을 부정하고 들어올려야 할 것을 들어 올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