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굵직하게 그어져 있던 남녀의 경계선이 흐릿해지고 있다. 성별과 무관하게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을 도입한 연극들이 활짝 꽃피우는 중이다.
지난달 24일부터 재연 무대에 오르고 있는 연극 ‘오펀스’는 상처를 지닌 고아 형제와 중년 갱 헤럴드가 서로를 보듬으며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풀어낸다.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젠더 프리 캐스팅. 2017년 초연 당시 남성 배우만 무대에 올랐던 것과 달리 이번엔 정경순 최유하 최수진 세 명의 여성 배우가 합류해 함께 무대를 이끈다.
김태형 연출가는 “가치 있는 이야기라면 화자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며 “위로와 격려를 통해 각자의 벽을 허무는 이야기가 여성의 입으로 전해질 때 또 다른 강력한 힘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설명했다. 성별 고정관념을 벗어나려는 시도이면서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이런 실험은 최근 들어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6일 막을 올린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도 비슷한 사례다. 같은 배역에 남녀 배우를 섞어 캐스팅해 해석의 지평을 넓혔다. 주인공 제이드 역을 발레리나 김주원과 남배우 문유강이 번갈아 맡고, 그의 친구 유진 역을 여성 소리꾼 이자람과 남배우 박영수 신성민 연준석이 돌아가며 연기하는 식이다.
지난달 27일 개막한 연극 ‘오만과 편견’은 여배우 김지현 정운선과 남배우 이동하 윤나무 이형훈이 번갈아 짝을 이뤄 무대에 오른다. 2명의 배우가 연령, 직업 등이 다른 21개의 캐릭터를 소화하는데, 이 과정에서 남녀 배역의 교차가 자연스레 이뤄지게 된다.
그렇다면 최근 연극 작품들의 이 같은 변화는 무엇에 기인하는 걸까. 지난해 연극계가 미투 운동의 중심에 섰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미투 운동은 고정된 성 역할을 깨닫게 하는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며 “젠더 프리 캐스팅은 성별 패러다임과 그에 따른 권력질서를 뒤집고 여성 역할의 확장을 모색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실제 배역의 전복을 통해 남녀 간 위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여성 배우들의 저변 확대를 도모하는 극들이 꾸준히 선보이는 중이다. 지난 7월 낭독극 형태로 꾸며진 연극 ‘묵적지수’는 초나라 혜왕과 묵가 등 주요 배역을 여성들로 캐스팅해 화제가 됐다. 전쟁 서사가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려는 방법이었다. 2017년 초연된 2인극 ‘비평가’는 지난해부터 여성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남성 지식인인 비평가와 극작가의 논쟁을 다뤘던 극은 이를 통해 성 불균형의 문제까지 바라보게 한다.
이 평론가는 “최근 젠더 이슈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짐에 따라 성평등에 대한 연극 제작진과 관객들의 생각도 깊어지고 있다”며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