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리는 얼음 TV 모니터… ‘여자 백남준’ 김순기 회고전

입력 2019-09-30 04:0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84년 프랑스 파리의 한 식당. 서로 알고 지내던 백남준(1932~2006)과 김순기(73)는 즉석 퍼포먼스를 했다. 색동지를 바닥에 두고 백남준은 ‘가갸거겨’ 한글을, 김순기는 어릴 적부터 배운 붓글씨를 썼다.

‘여자 백남준’이라는 평을 듣는 재불 작가 김순기의 회고전 ‘게으른 구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은 백남준의 작품 세계를 연상시키는 설치, 영상, 퍼포먼스, 개념미술 작품들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O.O.O’(사진)이라는 작품은 녹아내리는 얼음으로 만든 TV 모니터 모양의 조각이다. 개집 속에 TV가 있고, 그 TV 안에 개가 있는 작품도 흥미롭다. 73년의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 ‘조형상황 Ⅲ-보르도의 10월’은 수백개 풍선에 추를 달아 해수면에 두었다가 추를 잘라서 하늘로 날아오르게 한 대형 프로젝트를 기록하고 있다.

전시 제목 ‘게으른 구름’은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근면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71년 니스의 국제예술센터 초청작가로 선발돼 프랑스로 간 것이 계기가 돼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작품 세계 전반에 흐르는 전위적인 기운은 68혁명 이후 혁신적인 시대 분위기 속에서 무르익었다.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의 핵심인 존 케이지, 백남준 등과의 교유도 중요했다. 김순기는 78년 한 워크숍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고, 케이지의 소개로 백남준을 알게 됐다. 놀라운 것은 플럭서스의 세례를 받기 전, 대학 시절부터 그에겐 아방가르드 기질이 있었다는 점이다. 캔버스를 잘라서 빨랫줄에 걸고는 ‘소리’라고 명명한 것이 그런 예다. 작가는 “회화는 사각틀에 갇히지만, 소리는 한계가 없어 좋았다”고 했다. 전시는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한국엔 덜 알려진 여성 작가를 조명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내년 1월 27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