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치유 첫걸음은… “꽁꽁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입력 2019-09-27 00:06 수정 2019-09-27 00:11
게티이미지

30대 후반의 독신 남성 저스틴은 성공한 청년사업가다. 그의 고민은 이성교제에 번번이 실패한다는 점이다. 여성과 가까워질 때마다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관계가 발전되지 않고 이별로 이어졌다. 이 문제로 정신과 상담을 받던 중 그는 9세 때 사촌형과 음란물을 본 경험을 기억해냈다. 왜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는지 묻자 그는 답했다. “내 행동에 혼란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사촌형은 평판이 좋았기에 아무도 내 말을 믿을 것 같지 않았고요.”

법률회사에서 일하는 워킹맘 칼라는 자신을 괴롭히는 불면증의 원인이 ‘혼외 관계’에 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 중 무심코 상사와의 불륜을 고백한 그는 남편이 자신의 외도를 눈치챈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가 불면증 치료를 위해 남편에게 고백할 것을 제안했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가족과 회사, 교회공동체에 미칠 파장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미국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에서 일하는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10여년간 진료실에서 마주한 사연들이다. ‘대인관계 신경생물학’을 전공한 저자는 연구 분야에 기독교 영성을 접목해 기독교 지도자를 훈련하는 ‘알려짐을 위한 센터’(Center for Being Known)의 설립자다.

그는 언급된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수치심으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수치심이 인간관계의 최소 공통분모이며 인간이라면 모두 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본다. 가벼운 무안함부터 심한 굴욕감에 이르기까지 경중은 달라도 누구나 어느 정도는 경험한다는 것이다. 수치심이라고 하면 대개 유명인의 비리, 정치인의 실언 등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일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주변의 가까운 지인도 모른 채 홀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장의 실업, 파경 직전인 결혼생활, 공부에 흥미를 잃은 자녀 등을 수치스러워 하면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이 그런 사례다.


수치심은 보통 자신의 잘못에 따른 감정이라고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수치심이 개인의 상호작용을 넘어서는 개념이라 말한다. 한 개인의 수치심을 자아내는 작은 일로 시작된 일도 다수가 연루되면 가정과 일터, 교회, 혹은 지역사회까지 삼키는 재앙급 논쟁거리로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개인 차원에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기하급수적으로 세력이 커져 국가와 세계에 이르기까지 문제와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일부 중동 지역에서 자유연애로 가족에게 수치를 안겼다며 ‘명예 살인’을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수치심의 보편성과 일상성 때문에 우리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미국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미리암은 상관에게 매번 ‘착실하고 똑똑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새로 투입된 팀에서 상관이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걸 눈치챈다. 6개월간 열심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상관은 수시로 불러내 그의 실적을 깎아내렸다. 주변에선 상관의 문제라고 입을 모았지만, 그는 ‘실망시킨 내가 잘못’이라며 자책하다 우울증에 걸렸다. 저자는 그와 상담하던 중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어린 미리암’의 좌절을 발견한다.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면 수치심을 갖고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렸던 건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작은 수치심을 내면에 은폐함으로써 사회생활에 큰 지장이 초래된 것이다.

저자는 수치심이야말로 악이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적극 활용하는 무기임을 강조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수치심을 느끼고 주님의 낯을 피한 것이 대표적이다.(창 3:7~8)

본문 내내 수치심을 의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분석한 그가 제시하는 수치심 치유 방안은 ‘알려짐의 경험’이다. 자신의 실상이 타인에게 드러나 취약한 상태가 되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숨긴 것을 온전히 노출할 때, 인간의 약함을 정확히 아는 주님이 치유를 시작한다. 이런 면에서 수치심은 인생의 위기를 직면하게 하는 동시에 주님을 충만히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삶이 수치심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하나님을 내 인생 이야기의 공동 저자로 모셔보면 어떨까. 그분은 취약한 우리를 도와 위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분이니 말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