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진료 후 남은 업무를 정리하고 나서니 병원이 고요하다. 언제나 소음으로 북적이던 곳답지 않게 조용한 실내에서 빛이 반사되는 대리석 바닥을 운동화로 타박타박 밟는 소리가 마치 베이스 음 같다. 오전 내내 앉아 하던 진료로 어딘가 굳은 몸이 슬슬 신체 리듬을 깨운다. 나는 얼마 전 다리를 심하게 다쳐 구두를 신기 어려워졌다. 오랜 수련기간 보수적으로 받은 교육 탓에 수술 후 복귀한 초기에는 진료와 회진 때마다 운동화를 신은 발이 어딘가 머쓱했다. 게다가 외부 회의나 강의할 때의 운동화는 왜인지 예의를 차리지 못한 듯하여 민망하다. 하지만 구두를 못 신게 되어 얻은 최고의 수익은 걷기의 즐거움을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서류들과 책을 끼고 병원과 학교를 오갈 때, 전보다 훨씬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걷기는 여러 면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축복이다. 신체 건강에 대한 것은 그간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해 왔으니, 여기서는 마음에 대한 것을 보자.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라는 질환이 있다. 큰 충격으로 뇌의 기능이 다쳐 다양한 신체, 심리적 증상을 보이는 병이다. 치료법 중 하나는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인데, 복잡한 이론을 간단히 말하면 ‘양측성 자극’으로 뇌를 재활하는 것이다. 전문 치료만큼은 아니어도 일상의 소소한 스트레스와 자극을 처리하기에 도움을 줄 양측성 자극은 무엇일까. 두 눈으로 풍광을 보며, 양다리와 팔의 움직임으로 걷는 걸음이 바로 그것이리라. 많은 연구에서 운동이 가벼운 수준의 우울과 불안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낙엽과 흙의 촉감, 바람의 흐름,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빛을 느끼며 걸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대인에게 당장 자연 속으로 간다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다. 그렇다면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지지 않는 요즘, 익숙한 신발을 신고 터벅터벅 한 걸음씩, 멍 때리는 순간이 잠깐이라도 올 때까지 걸어보자. 병 전 단계의 스트레스라면 마음이 1g은 가벼워질 테니. 비우는 동안 더 많은 것이 남을 것이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