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는 교회 수에 비해 신학생이 부족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대전노회에서 작은교회 교육전도사나 시골교회 단독목회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던 때였다.
76년 3월 당시 대전 은행동에 있던 대전신학교에 진학했다. 중졸이 전부였기 때문에 초급대학 2년제 과정인 예과에 속한 별과에 입학했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60명이었다. 신학교에서 3학년까지 공부하면 총신대 목회학과 3학년에 편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신학생 때 특별한 멘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기도와 말씀에만 집중했다. 학기 도중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거나 시골교회에 목회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이 없던 터라 차일피일 미뤘다. 마음속에는 어려운 시골교회의 30명 목회가 깊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하나님과 서원을 했으니 그분이 두려워서라도 목회는 해야 한다. 목회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 같은 게 도시 목회를 할 수는 없다. 나는 시골교회에서 목회할 것이다. 성도는 30명이면 족하다. 목사 속이나 썩게 하는 교인들이 많으면 무엇하랴. 많을수록 더 속만 썩을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목회 상을 갖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30명 이상 목회는 무리였다. 사교술에서 외모까지 모두 수준 이하였다. 스스로를 점검할 때면 늘 못하고 부족하고 약한 것밖에는 없다며 자학했다.
그래도 잘할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는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이든 남한테 주는 것이다. 어머니는 무엇이든 많이 하시는 분이셨다. 밥을 하든, 떡을 하든, 전을 부치든 어머니는 항상 큰손이셨다. 그래서 베푸는 삶을 배웠다.
또 하나는 권위 앞에 조건 없는 순종이었다. 일곱 살 이후로 나는 늘 복종이었다. 철이 들은 이후로 권위자 앞에 “아니오”라고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순종 훈련이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후 얼마나 유익했던지 모른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도들은 목사에게 피차에 순종하면 마찰이 있을 수 없다. 소리 지르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이전에 한두 번, 교육전도사에 대한 제의를 받았지만 나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 조금 더 공부하고 시골교회로 가야 하는데.’ 하지만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 주님의 보이지 않는 세밀한 손길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본래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것 외에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름 책을 읽는다고 했지만, 지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시골 아저씨 타입이었다.
그래서 도시교회는 물론이고 지적이고 예리하게 보이는 목사님 밑에서 부교역자로 섬긴다는 것은 고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78년 내게 가장 꺼리는 타입의 목사님으로부터 교육전도사 청빙 제의가 들어왔다.
그분은 대전 남산교회를 담임하며 우리 신학교의 학생과장과 교수를 맡고 계셨다. 지방신학교 교수님 중에서 보기 드문 석학이셨다. “이영환 전도사, 우리 교회 부교역자로 오시게.” 목사님이 두어 번 부탁했지만, 도저히 그분 밑에서 부교역자로 섬길 자신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함이 많아서 불가능합니다.”
나는 나약함 때문에 목사님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목사님은 오해하고 계셨다. 교회가 작으니까 교만해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신 것 같았다.
그 목사님은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분이 금식하시면서 인편을 통해 내게 기도원으로 한번 들어오라고 하셨다. 예의상 가봐야 하지만 분명 교육전도사로 오라는 말씀을 하실 게 뻔해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분이 아주 서운해하시며 동료 신학생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영환이, 제 놈이 얼마나 잘났으면 내 그리 사정하는데도 요청을 거절해. 이제 앞으로 제가 사정사정해도 내가 제까짓 것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그 힘든 금식 중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기름 부음을 받은 주의 사자를 아프게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목사님은 40일 금식을 무사히 마치시고 남산교회에 돌아오셨다. 아무래도 한 번쯤은 들러야 할 것 같았다. 당시 특정 교회를 섬기지 않고 주일 낮 예배를 순회하고 있었다. 남산교회를 찾아갔다. 금식을 마치신 후라 그런지 이전에 목사님이 아닌 것처럼 아주 은혜로운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드리니 예상외로 너무나 좋아하셨다. “이 전도사, 사택에서 점심 먹고 가라고.” 그분의 눈빛이 아주 강렬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가야 할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녁 식사 후 미리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는데, 목사님이 난처한 부탁을 하셨다. “이 전도사, 내가 금식 후라 그런지 힘이 드네. 저녁 설교를 좀 해주게.”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앞이 깜깜했다. 급한 대로 강단에 따라 올라갔다.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준비도 없는 설교를 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을 붙잡고 강단 뒤에서 죄인 아닌 죄인이 돼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갑작스레 목사님이 강단에서 선포해버렸다. “오늘 설교하신 이영환 전도사님이 오늘부터 우리교회 교육전도사로 일하실 것입니다.”
▒ 장자권은 이것이다
장자권은 천국 상속권… 장자가 된 자들은 복음 위해 고난 각오해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포하셨다. 아들인데 장자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장자들을 살리시려고 어린 양의 피를 흘려주셨다.
구약에서 어린 양의 피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다 하나님의 장자들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예수님을 영접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상속자인 장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상속자는 하나님의 장자다.
장자들은 천국을 상속받는다. 장자권은 천국 상속권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위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인 장자다. 하나님의 상속자인 장자에게는 분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하늘나라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장자들을 위해 하늘나라의 영광을 예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우리에게 따르는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인 장자가 됐다면 하늘나라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당연히 고난을 향해 뛰어들어야 한다. 복음을 위한 고난, 교회를 위한 고난,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당연히 여기고 기뻐해야 한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장자가 된 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이 세상에서도 반드시 고난 후에 영광을 얻게 돼 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는 자들이 고난 없이 정상에 설 수 있었겠는가. 고난 없이 영광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산 후에 많은 고난이 따랐다. 그러나 야곱은 분명히 천국 상속권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천국에 살아 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렇다. 장자권을 산 야곱은 그 장자권으로 인해 천국에 앉게 됐다. 야곱은 장자권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상속받게 됐다. 하지만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는 어떻게 됐는가.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6~17)
에서는 장자의 명분, 곧 장자권을 한 그릇 음식을 위해 팔아버렸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평가에 망령된 자가 되고 말았다. 기회를 얻지 못하고 버린 바 됐다. 무슨 의미인가. 지옥에 버림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앉지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진 것이다.
장자권은 이토록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장자권을 받았느냐 받지 못하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갈라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장자권을 받았으면 천국이요, 받지 못하였으면 지옥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장자인 천국 상속자인 것이다. 당연히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인 장자라면,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자라면 이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모든 보화를 하늘에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0~21)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인 장자가 확실하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것이 확실한가.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늘나라에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에 있어야 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