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게 맹갱 외에밋들’. 전북 김제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글귀다. ‘징게 맹갱’은 ‘김제 만경’을, ‘외에밋들’은 ‘넓은 들’을 일컫는다. 서해로 흘러드는 동진강·만경강 사이에 펼쳐진 국내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 그 중에서도 김제시와 만경읍 일대는 ‘국내 유일의 지평선’을 이루는 광활한 들판이다. 가을이면 익어가는 벼가 황금물결을 이룬다. 갑갑한 도시에서 벗어나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드넓은 들녘과 살랑살랑 코스모스가 반기는 김제로 떠나보자.
김제시 부량면에 벽골제(사적 제111호)가 있다. 삼한 시대 호남평야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한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다.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 시대 3대 수리 시설로 꼽힌다.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축조됐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처음 벽골지를 여니 둑 길이가 일천팔백 보다)’라고 기록돼 있다.
벽골제는 관광단지로 조성돼 있다. 출입구로 들어가 장터 등을 지나면 거대한 용 조형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높이 15m, 길이 54m에 달하는 두 마리 용이 마주 보는 모습은 벽골제의 규모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한다. 벽골제에 얽힌 설화를 형상화했다. 옛날 인근에 ‘범생이’ 백룡과 ‘심술짱’ 청룡이 살고 있었다. 둑을 무너뜨리려는 청룡과 싸움에서 패한 백룡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자 청룡은 더욱 심술을 부렸다. 결국 김제 태수의 딸 단야를 제물로 바쳐 청룡을 달래고 나서야 가까스로 둑 보수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용 조형물 뒤로 벽골제 둑이 보인다. 당초 부량면 신털미산에서 명금산까지 3㎞에 달한 둑의 일부다. 당시 둑 공사에 동원된 일꾼들이 짚신의 흙을 털거나 짚신을 버린 것이 산을 이뤘다는 용성리 포교마을 ‘신털뫼(草鞋山)’ 전설과 일일이 손으로 셀 수 없어 500명이 논을 만들어 일꾼을 세었다는 ‘되배미’ 이야기가 공사의 규모를 대변해준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농지개량조합이 둑을 김제간선수로로 개조하면서 과거 거대한 저수지는 논으로 바뀌고 작은 물길과 둑만 남았다.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다섯 개의 수문도 두 개밖에 안 남았다.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둑을 따라 남쪽으로 2㎞가량 떨어진 경장거다. 장생거 수문은 거대한 돌기둥 한 쌍을 세우고 물에 둑이 깎이지 않도록 돌로 단을 쌓았다. 장생거를 축소한 수문 체험장에서 논에 물을 댄 방법을 볼 수 있다. 돌기둥 양쪽 위에 설치된 물레를 돌려 수문을 여닫는다.
벽골제에는 농경문화를 주제로 전시하는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농경사주제관과 체험관, 숙박이 가능한 전통가옥 체험마을, 민속놀이 마당 등 다양한 체험 시설이 조성돼 있다.
벽골제 건너편에는 김제를 무대로 일제치하에서 겪었던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아낸 대하소설 ‘아리랑’과 조정래 선생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는 아리랑 문학관이 있다. 2층 전시실에 깨알 같은 글씨의 취재수첩 및 자료 노트들이 눈길을 끈다. 소설에서 감골댁과 아들 방영근이 살던 외리마을과 지삼철과 손판석이 살았던 내촌마을은 서로 이웃한 들녘마을로, 문학관에서 가깝다. 아리랑문학마을이 조성돼 있다. 민초를 착취하고 탄압한 죽산면사무소와 죽산주재소·우체국·정미소 등 근대 수탈 기관, 안중근 의사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하얼빈(哈爾濱)역 등이 재현돼 있다.
죽산면에는 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인 일본인 대지주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이 있다. 서양식 석조 건축물을 모방한 단층 건물로, 정면 중앙 주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 2개씩의 수직 창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러일전쟁 당시 통역관이었던 하시모토는 김제로 들어와 살면서 동진강 일대를 간척하고 닥치는 대로 토지를 사들였다.
가을 김제의 또 다른 명물은 끝없이 펼쳐진 황금들녘을 따라 조성된 메타세쿼이아와 코스모스 길이다. 빨랫줄처럼 곧게 뻗은 왕복 2차선 회색빛 아스팔트길 양쪽으로 삼각뿔 모양의 가로수와 그 아래 키를 낮춘 코스모스가 함께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 유명하다.
이 일대에서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소설 ‘아리랑’의 묘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광활면’이라는 지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진봉면 망해사 뒤 구릉 같은 진봉산(해발 72m) 전망대에 오르면 넓게 펼쳐진 들판과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김제의 유일한 항구인 심포항이 지척이다. 과거 물이 들 때는 끝없는 바다였고, 물이 빠질 때는 드넓은 갯벌이었던 곳으로, 조개의 집산지였다. 떠들썩했던 항구는 한적하게 남아 있다.
여행메모
27일∼내달 6일 ‘김제지평선축제’ 개최
백합·꽃게·한우·지평선 쌀… 웰빙 먹거리
수도권에서 승용차를 이용해 김제 벽골제로 간다면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 나들목에서 빠져 29번 국도로 갈아타면 된다. 당일 여행이라면 벽골제→아리랑문학마을→죽산면 옛 일본인 농장 사무소(하시모토 농장 사무소)→김제평야(메타세쿼이아길)→진봉산 순서로 둘러보면 좋다.
27일부터 10월 6일까지 벽골제를 중심으로 우리 농경문화의 정체성을 계승하고 벽골제의 의미를 되새기는 제21회 김제지평선축제가 열린다. ‘Over the horizon! 건강한 축제! 신나는 축제!’라는 슬로건으로 110개의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벽골제 입장료는 3000원이지만 지평선축제 동안 무료다.
김제의 최고 먹거리는 백합이다. 생합으로 불리는 백합은 비타민·무기질이 풍부한 고단백·저열량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심포항에서 백합탕, 백합죽, 백합구이, 백합회, 백합찜 등을 맛볼 수 있다. 싱싱한 꽃게로 요리한 꽃게탕과 꽃게찜도 심포항의 별미다. 총체보리를 먹고 자란 김제 한우는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워 최고급 한우로 꼽힌다. 김제에서 생산되는 지평선 쌀은 단백질과 아밀로스 함량이 높아 밥을 지으면 윤기가 많이 흐른다.
김제=글·사진 남호철 여행전문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