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법원이 보리스 존슨 총리의 ‘의회 정회’ 결정을 위법으로 판단하면서 이번 소송을 주도한 지나 밀러(51·사진)에게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반면 존슨 총리는 정치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압박을 받는 신세가 됐다.
BBC 등 영국 언론은 24일(현지시간) 영국 정부 상대 소송에서 두 번이나 승소하며 브렉시트의 흐름을 바꾼 밀러에게 주목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반(反)브렉시트 활동가인 밀러는 2016년에도 영국 정부가 의회의 승인 없이 브렉시트 절차를 추진할 수 없다는 내용의 소송에서 승리를 거뒀다.
밀러는 남미의 영국령 가이아나 출신으로 인도계다. 10살 때 영국에 유학온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금융계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2007년 재혼한 남편 앨런과 함께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자선 활동과 시민사회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9년 설립한 ‘진실·공정 재단(the True and Fair Foundation)’을 통해 소규모 자선단체의 자금유치 활동을 돕는 한편 금융계의 투명성을 높임으로써 소비자나 기업인들이 금융스캔들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자는 캠페인을 펼쳤다. 금융계의 잘못된 관행을 폭로하는 활동 때문에 당시 업계에서는 그를 ‘블랙 위도 스파이더’(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미국산 독거미)라고 부를 정도였다.
밀러는 대법원 판결 직후 “이번 소송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것”이라면서 “의원들은 의회로 돌아가서 용감하고 대담하게 부도덕한 존슨 내각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 브렉시트 관련 밀러의 소송 후 테리사 메이 총리는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EU) 합의안을 하원 투표에 부쳤다가 세 번이나 실패해 총리직을 사임했다. 메이 총리에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존슨 총리는 ‘의회 정회’라는 변칙을 도입했다가 회복 불가능한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지난 10일부터 정회 상태였던 영국 의회는 25일 상·하원이 모두 다시 열렸고 존슨 총리는 야당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1827년 조지 캐닝 총리의 120일 재임이라는 역대 최단명 기록을 깰 가능성도 있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나라를 잘못 이끈 존슨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렉시트당을 창당한 노딜 브렉시트 찬성파 나이절 패라지조차 “의회 장기 정회는 최악의 수였다”며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의를 표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존슨 총리는 사퇴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대법원 판결을 접한 존슨 총리는 “10월 31일 브렉시트를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유엔 총회 일정을 단축하고 귀국한 존슨 총리의 향후 행보와 관련해선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제기된다. 가디언은 EU와의 새 합의, 노딜 방지법 이행(브렉시트 3개월 연기), 노딜 브렉시트, 조기총선, 내각 불신임 투표, 브렉시트 철회 등이 있다고 전했다.
현재로서는 브렉시트 3개월 연기 후 조기총선 개최가 가장 합리적이지만 존슨 총리는 26일 즉각 조기총선을 표결에 부칠 가능성이 높다고 인디펜던트가 전했다. 존슨 총리의 측근들은 세 번째 조기총선 표결에서도 패배하면 다시 정회를 시도해 대법원 결정에 저항하라고 총리를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