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눌 말씀은 누가복음 16장 9절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자기 관리를 위해 필요한 건 바로 이웃이다. 종종 길을 가다 ‘초아의 봉사’라는 문장이 바위에 새겨진 걸 본 일이 있다. 자기를 초월하는 봉사라는 의미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호두껍데기 속 같은 우주에서 인간은 누구나 제왕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나라는 껍질 안에서 자신을 제왕으로 여기며, 자기 중심성 안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태어나서 나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게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나를 세상의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살아간다. 그런 인간이 과연 자기를 초월하고 자신을 부정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본다.
힘겹게 번 돈을 찾아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행위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초월의 단면을 엿본다. 내 배가 텅 비어서 굶주렸는데 밥을 덜어 더 굶주린 사람의 밥그릇에 담아주는 것도 본다. 자신을 초월하는 모습이다.
1991년 광주에서 이상희 대위가 조종하던 전투기가 다른 전투기와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대위의 나이 24살 때였다. 충돌 즉시 두 비행기는 추락했다. 어찌 된 일인지 추락하는 전투기에서 이 대위는 탈출하지 않았다. 부딪힌 다른 전투기 조종사는 비상탈출을 해 목숨을 건졌다. 이 대위는 전투기와 함께 산화했다. 그는 추락 직전 이런 무전을 쳤다. “추락한다. 탈출하겠다.” 하지만 잠시 후 이 대위는 뭔가를 보고 놀란 듯 결단을 번복했다. “전방에 민가가 보인다. 탈출 불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산산 조각난 비행기 안에서 조종간을 붙잡고 있는 시신이 발견됐다. 이 대위는 마을을 피해 온 힘을 다해 조종간을 붙잡고 미나리밭으로 기체의 방향을 틀었다. 마을 주민들도 그 장면을 목격했다. “비행기가 추락할 지점을 정해 놓고 그쪽으로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은 어느 순간 자기를 초월할까. 바로 사랑할 때다. 누군가를 사랑해 봉사하고 싶어질 때 호두껍데기가 깨지고 종의 모습으로 걸어 나온다. 사람들은 혼자 밥 먹을 때 대충 먹는 경향이 있다. 큰 상 차려 놓고 비싼 그릇을 꺼내 요리를 담아 먹지 않는다. 누군가를 대접할 때는 달라진다. 귀찮다고 맹물에 맨밥을 말아 드시던 어머니도 자식이 온다고 하면 수라상을 차려 낸다.
자기를 초월하는 사랑의 에너지는 내가 섬겨야 할 타자가 존재할 때 빛을 발한다. 자녀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절망하고 무너진다. 반면 부모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 있어도 그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난다. 관절이 녹아내렸어도 기를 쓰고 일어나는 게 부모다.
자신이 봉사하고 책임져야 할 자녀들이 있기에 에너지를 짜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관리란 자기 초월과도 같다. 자기를 통해 호두껍데기 안에 있는 제왕을 성공시키자는 게 아니다. 자기를 잘 관리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제왕을 ‘섬기는 자’로 개종시키는 걸 의미한다.
불의한 청지기는 관리에 실패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욕망을 따를 때 실패하게 된다. 이기적인 욕망을 뛰어넘는 자기 초월은 이웃을 향할 때도 일어난다.
이기적인 사람은 타자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태우는 열정의 불길을 일으키지 못한다. 자기 관리에 성공하려면 늘 내 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을 초월하고 싶은가. 자기 관리에도 성공하고 싶은가. 선택할 길은 하나다. 나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을 먼저 찾아 나서는 것이다. 찾았다면 내 것을 그와 나눠야 한다. 자기 초월과 자기 관리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창우 박사(선한목자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