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은 만화카페인데… 밀실 있으면 ‘유해’ 없으면 ‘무해’?

입력 2019-09-25 04:04

서울 서대문구의 한 초등학교 정문에서 한 블록(150m)만 건너면 만화카페가 나온다. 아늑한 다락방 40여개와 게임기, 발마사지 기기 등을 갖춘 이곳은 인근 학생들이 부모 교사 친구들과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다.

그러나 현행법상 이 만화카페는 언제든 폐업 조치를 당할 수 있다. 만화대여업은 청소년유해업소로 지정돼 있고, 유해업소는 교육환경보호구역에서 영업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학교 반경 50m 이내인 절대보호구역에서는 만화방 운영이 아예 불가하고, 200m 이내 상대보호구역에선 교육환경보호위원회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교육감은 교육환경보호구역 내 유해시설에 대해 시설 금지 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카페 매니저 김모씨는 24일 “요즘 만화카페는 밀폐된 공간이나 담배 연기, 성인물 대여 등 옛날 만화방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와는 180도 다르다”며 “학생들이 건전하게 만화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왜 유해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이처럼 만화카페를 운영하는 업주들은 만화대여업이 청소년유해시설로 묶여 여러 규제를 받는 데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많다. 규제가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환경보호구역 내 만화카페 운영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들쑥날쑥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4일 서울시 남부교육지원청이 구로구의 한 만화카페에 내린 시설금지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 만화카페는 초등학교에서 109m 떨어진 곳에 있다. 법원은 만화카페에 설치된 다락방을 지목해 “사실상 사방이 밀폐된 공간으로 외부의 관리·감독을 쉽게 피할 수 있다”며 “불량 청소년들의 모임 장소 내지 청소년 범죄의 온상이 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 만화카페가 통학로에 위치해 학생들의 출입 가능성이 크고, 이로 인해 유해매체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봤다. 법원 판결에 따라 이 만화카페는 올해 안에 문을 닫아야 한다.

카페 주인 한모씨는 “다락방에 커튼이 절반 정도만 쳐져 있어 완전한 밀실이 아니고, 청소년 구독 불가 만화책은 별도로 진열해 관리하고 있다”며 “커튼을 다 치우겠다고 사정했는데도 폐업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한씨는 “주변에 대학과 야구장이 있어 술집, PC방이 즐비한데 왜 만화카페만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동작구의 다른 만화카페는 지난해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트인 공간에 밝은 조명이 설치돼 있고, 밀실이나 밀폐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시설금지 처분 취소 결정을 받았다. 재판부는 만화카페의 실내 환경이 보건, 위생, 안전 측면에서 열악하지 않아 청소년 범죄를 일으킬 우려가 높지 않다고 봤다. 같은 만화카페를 두고 교육 당국은 청소년에게 해롭다며 금지 처분을 내렸지만 법원은 금지 취소를 결정한 것이다.

업계에선 이런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고 단편적이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크다. 한국교육개발원도 2016년 낸 보고서에서 “만화대여업에 대한 유해 인식도가 낮아졌다”며 “‘다락방 같은 곳에서 남녀가 누워 만화 보는 시설’을 유해시설로 볼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견이 잇따르자 정부는 이날 학교 주변에서 만화카페를 운영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 관계자는 “의견 수렴을 거쳐 연말까지 결론을 내겠다”고 말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