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1) “너는 커서 목사가 돼야 한다” 어머니의 당부

입력 2019-09-26 00:01
박종순 목사가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한국교회지도자센터에서 인터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40년, 나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화선 전도사는 경남 함안에서 농사를 지으시다 머슴에게 모든 걸 뺏기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가족은 전북 정읍의 작은 마을 화호리에 정착했다. 말이 정착이지 피난 온 셈이었다. 아버지는 화호교회에서 설교하셨던 조사였다. 평일에는 농사짓고 주일에는 교회 종 치는 일부터 청소와 설교까지 도맡아 하셨다.

신학을 공부하셨을 리 없는 아버지는 오직 기도로 설교를 준비하셨다. 주석도 없으셨다. 단지 1932년 쉬러 윌리엄 선교사가 쓴 ‘구약사기’라는 역사책을 참고해 설교를 준비하셨다고 한다. 신학을 배우지 못하셨지만 언제나 정성스럽게 설교를 준비하셨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는 구약사기 책을 펴보거나 가만히 볼에 대 봤다. 아버지는 이 책을 유산으로 남기셨다. 어렸던 난 그 책에 기대 아버지의 숨결을 느꼈다.

어머니 최선옥 권사는 마흔세 살에 날 낳으셨다. 노산이었다. 세 명의 누나들에 이어 첫 번째 낳은 아들이자 마지막 자식이었다. 아들이라고 특별 대우를 받았던 기억은 없다. 가난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큰일이었다.

대신 어머니는 길을 보여주셨다. “종순아. 너는 커서 목사가 돼야 한다. 엄마랑 약속하자.” 눈만 마주치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만큼 자주 이야기하셨다.

아들의 꿈을 정해주셨지만, 목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셨다.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면서 힘겹게 살아가던 분이 목사가 되는 길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가 목사가 되기를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셨다. “주님, 종순이를 주님의 종으로 바칩니다. 좋은 목사 되게 해 주세요.” 어머니의 기도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가난을 이긴 힘은 신앙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설교하시던 화호교회에 다녔다. 나만 신앙에 의지했던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동네 사람들은 우릴 불쌍하게 여겼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가장까지 없으니 걱정이 될 법도 했다.

어머니는 배운 건 없으셨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기쁨을 아셨다. 새벽마다 날 깨우셨다. 그 길로 교회로 향했다. 어두웠던 새벽길,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아마 어머니도 내게 의지해 새벽길을 걸으셨으리라. 교회에 도착하면 무릎을 꿇으셨다. 나도 서성이다 눈을 감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들리는 건 어머니의 기도 소리뿐. 나는 그 기도 안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내 체온을 느끼며 기도하셨다.

기도의 그늘은 날 담대하게 만들었다.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부잣집 아이들이 부럽지도 않았다.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했다. 배고프면서도 누구보다 배부른 것처럼 행동했다. 위선이 아니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늘 배부르니까.

박종순 목사 약력=1940년 전북 정읍 출생. 장로회신학대·숭실대 졸업, 미국 풀러신학대 목회학 박사, 서울 충신교회 담임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숭실대·국민문화재단·한국세계선교협의회 이사장 역임. 현 충신교회 원로목사, 한국교회지도자센터 대표.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