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냥 예수의 이름으로 손 얹어 기도하면 낫는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육신의 질고에서도 해방시켜 주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신유의 근거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육신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전인적인 구원인 것이다.
이사야서는 고난의 메시아 사역을 가장 잘 예언한 장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의 메시아의 사역으로 인해 나타날 결과를 두 가지로 말씀한다. 첫째,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이다. 메시아의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불화한 관계가 청산되고 화목한 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둘째,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다. 육신의 질고에서 치유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육신의 질고는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사망이 우리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죄의 문제가 해결됐기에 육신의 질고 또한 해결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사야 53장 4~5절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됐는지를 말씀해 준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신유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에 근거한 것이라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확실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따르는 표적인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신유사역을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다’ 또는 ‘모두’이다. 예수님께 나온 병자들은 어떤 병이든 다 치유를 받았다. 한 사람도 고침 받지 못한 자가 없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마 4:23~24)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마 12:15)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 14:36)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됐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치유의 놀라운 역사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교회 생활의 지침을 각 교회들에 가르쳤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초대교회의 사역에는 언제나 왕성한 신유의 역사가 있었다. 예수님께 주신 구원이 영혼의 구원만이 아닌 육신의 구원까지도 포함한 전인적인 구원인 것을 바르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확한 성경의 근거에도 불구하고 신유에 대한 오해를 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제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만, 모두가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다 한 사람 치유되는 것을 갖고 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유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불신앙 때문이다. 신유는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 신유는 나타나지 않는다. 바르게 알 때 바르게 믿을 수 있고 그때 믿음의 표적이 따르게 된다.
오창균 목사<서울 대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