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사람들을 모시고 고전 문학작품을 읽는다. 이 달에 함께 읽은 것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다. 내 생각에, 책이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상자 같은 것이다. 인생에서 해결해야 할 절박한 질문이 있을 때, 책을 잘 읽을 수 있다. 어려운 시간을 쪼개 함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는 뜻이다. 프랑스 비평가 조르주 풀레의 말을 빌리면, 이 작품의 경우에는 “지루한 시간”이다.
현대적 삶의 가장 큰 문제는 공허다. 어제가 오늘,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이 무한반복된다. 하루하루 너무 바쁘게 살아가지만, 모아서 한 주일을 돌이켜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한 달이 지나면 오늘의 이 열정은 허무가 되고, 한 계절이 지나면 삶의 디테일이 증발하며, 한 해가 지나면 이렇게 사는 것도 삶인가 하는 회의가 든다. 플로베르는 꿰뚫어 쓴다. “소리 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한 해가 가을로 치닫는다.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 세상은 늘 분주하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호들갑 떤다. 재촉하고 닦달하고 속력을 올리라고 주문한다. 소셜미디어에 말을 보태고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와 하트를 주고받고 치받으며 다투고 갈라선다. 하지만 돌아보라. 올 한 해 우리 영혼의 건강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이 정말로 있었는가. 온갖 것이 주의를 홀리고 생각을 빼앗지만 대부분 비슷한 일이 한없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의 무의미, 엠마 보바리의 영혼을 서서히 덮어갔던 텅 빈 시간만 계속되었을 뿐이다. 대중문화에서 ‘좀비’가 유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죽어도 죽은 것 같지 않게 살아가니까 말이다. 이것이 정녕 살아 있다는 것인가.
“결혼하기 전까지 엠마는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응당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에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 인생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소설에서 엠마는 한없이 사랑을 갈구한다. 희열도, 정열도, 도취도 없는 시간을 보내는 현재의 자신이 진짜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이 삶과 다른 삶의 형식이 어딘가 존재할 것으로 여긴다. 엠마의 삶에는 ‘지금 이 순간’의 충족이 없다. 지나간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앞으로 올 것을 몽상하는 상태만 있다. 하지만 영혼을 들뜨게 했던 그날이 막상 닥쳐오면 엠마는 순식간에 싫증을 느끼면서 행복을 유예한다. 이로부터 지나간 과거가 차라리 괜찮다고 느끼거나 신비로운 사건이 일어날 미래가 항상 더 나아 보이는 권태의 심리학이 탄생한다.
엠마는 공허를 이기지 못해 행동하고, 행동함으로써 어떤 기쁨을 얻지만, 곧장 흥미를 잃고, 또다시 공허로 떨어진다. 마음의 그늘 속에 권태의 거미가 한 번 더 줄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 엠마는 또 다시 행동에 나서고, 싫증을 느끼고, 마음의 수레가 한 번 더 돌아간다. 권태는 더욱 깊어지고, 수렁을 벗어나려는 행동 강도도 함께 높아진다. 엠마는 결국 기쁨 없는 쾌락에 몰두해 자신을 모조리 잃는다. 어느 순간 주어진 현실의 한계가 쾌락의 힘을 견디지 못할 때가 찾아오고, 정신이 문득 든 엠마는 파멸의 도끼가 자기 목을 내려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플로베르는 “지금 영위하는 고요한 생활”을 “자신이 꿈꾸어 왔던 바로 그 행복”이라 “생각할 수가 없는” 데서 엠마의 불행이 왔다고 말한다. 지금 이 자리의 삶에서 행복을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엠마가 된다. 일, 수다, 쇼핑, 여행, 알코올, 게임, 드라마 등 주변에 널린 무의미에 중독되기 십상이다. 미국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좌절이란, 인생에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력”이라고 했다. 용기는 마음의 어떤 상태가 아니다. 나날의 삶의 순간마다 의미를 발명하려는 분투를 통해 축적하고 배양해야 하는 능력이다. 올 한 해, 어느새 한 분기만 남았다. 무의미에 중독된 헛된 시간을 무찌르려 한다면 지금이라도 용기를 발휘하면 어떨까.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