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또다시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불길한 느낌이 왔다. ‘아, 이 통증은….’ 오사카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재일교포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염증 수치가 꽤 높게 나왔다. “호성군, 아무래도 종합병원에 가야겠는데….” 2년 전 수술을 했던 그 날이 기억났다. ‘또다시 올 것이 왔구나.’ 2003년 3월 20일 일본 오사카의 종합병원에서 수술 절차를 밟았다.
“엄마, 배가 또 아파요. 수술해야 한대요.” “아들아, 어떡하냐. 우리 아들 많이 아파?” 국제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흘리셨다. 당시는 아버지의 목회가 바쁘던 시절이라 어머니도 일본에 올 수 있는 형편이 안됐다. 설상가상으로 같이 있던 누나는 결혼 준비 때문에 한국에 가 있었다.
일본 의사가 말했다. “안상, 수술 전 몇 가지 검사를 하겠습니다. 계속 염증 수치가 올라가고 있어요.” 한국에서처럼 일본 의사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배를 열어보기로 했다. 일본 병원은 웬만해서 전신마취를 하지 않는다. 부분마취로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얼굴 아래로 커튼을 치고 수술이 시작됐다. 일본 의사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했다. 마취 주사를 놓는 것 같았다.
“안상, 느낌이 옵니까.” “아아, 왜 찔러요?” 갸우뚱하더니 주사를 다시 놨다. “안상, 아직도 느낌이 옵니까.” “아아.” “이상하네요.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하는데 말이죠.”
세 번 정도 더 주사를 놨다. “안상, 느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제 주사를 놨으니 아프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 수술하겠습니다. 지체하다간 마취가 풀릴 수도 있어요.”
의사가 메스를 들고 칼을 긋는데 서늘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으으으.” “안상, 느낌이 전혀 없을 순 없어요.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슥, 슥, 슥.” ‘배가 세 겹인가.’ 세 번 긋는 느낌이 왔다. 그때까지는 참았다. 근데 뭔가 좌우로 벌리는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배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악!”
의사들이 허겁지겁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론 기억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신마취를 뒤늦게 했다고 했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왔다. 옆구리부터 확인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국땅에서 가족도 없이 홀로 병상에 누워있으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동안 제멋대로 살았던 삶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회개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또렷한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도 내 양을 칠 목자가 부족하다!” “주님, 한국에 교회가 5만개가 넘는데 목자가 부족하다니요.” 두 번째 음성이 다시 들렸다. “아직도 내 양을 칠 목자가 부족하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정말이라면 저에게 확신을 주십시오. 비전을 보여주시면 제가 주의 종의 길을 가겠나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3가지 감동을 분명하게 주셨다. “교단의 벽을 허물라. 한국교회 희망의 불씨가 돼라. 상처 입은 성도들을 치유하는 교회, 병원과 같은 교회를 세우라!” 주님의 명령은 너무나 확실했다. 귀국 후 원서를 내려던 대기업도, 인생 계획도 모두 바꿨다.
기도 후 눈을 뜨니 옆구리에 박힌 튜브와 그것을 덮은 거즈가 보였다. 발뒤꿈치부터 면도날로 살을 벗겨내는 듯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하게 섰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다시 통증이 밀려오는 듯했다. “아, 제발, 제발 주님 도와주세요.”
이번에도 배에 염증이 가득했고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생제 때문에 차도가 있었는지 상태가 좋아졌다. 드디어 튜브 뽑는 날이 다가왔다. “안상, 내일 아침에 튜브를 뽑을게요.” 정신이 아득해졌다. 밤새 기도했다. “주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지나도 의사가 튜브를 뽑지 않았다. ‘거참 이상하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다. “왜 아직 튜브를 뽑지 않는 겁니까.” “아니, 사흘 전 아침에 뽑았잖아요.” “네?” 그렇다. 하나님께선 나의 고통을 아시고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튜브를 뽑는 고통을 제거해 주셨다. 퇴원하고 그해 5월 곧바로 귀국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