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일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직접 개입한 정황이 법정 증언을 통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당시 대법원의 핵심 관계자는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재판 선고를 수년간 지연하는데 주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 정황을 최근 증언했다. 법원행정처가 일본 전범기업 측에 유리하도록 ‘소송 지휘’를 했다는 진술도 나온 상태다.
김현석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현 변호사)은 지난 20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부장판사 박남천)에 증인으로 나와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을 전원합의체(전합)에 직접 회부했다고 증언했다.
검찰 관계자는 23일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혐의를 입증할 퍼즐조각이 상당 부분 맞춰졌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동안 양 전 대법원장이 대일 관계를 우려하는 ‘박근혜 청와대’의 뜻에 따라 이 사건을 전합에 회부해 선고를 늦추고 결국엔 징용 피해자 측 청구를 기각하려 했다고 주장해 왔다.
김 전 연구관은 2016년 11월 당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한 논의가 ‘보안’ 명목으로 대법원 내부에서도 비공개로 진행됐다고 새롭게 밝혔다. 당시 이 사건을 다룬 전합 회의의 안건목록에는 ‘회람 목록에는 보안 관계로 삭제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전합 회의 안건목록을 확정하는 건 대법원장이다. 김 전 연구관은 이후에 동일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사건에 대한 논의는 이듬해 3월까지 대법관들과 수석·선임재판연구관 등 극소수만 아는 상태에서 진행됐다. 김 전 연구관은 증인신문에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외부에 알려지는 게 불필요한 논란이 되지 않을까 판단한 것 같다”고 했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전합 논의가 비공개된 시점은 외교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해 달라”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낸 때와 겹친다. 검찰은 당시 행정처가 외교부와 긴밀히 연락하며 의견서 제출 작업을 진행했다고 공소장에 적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외교부가 의견서를 내자마자 전합에서 논의한 사실이 드러나면 ‘서로 짜고 진행한다’는 의혹이 제기될 것을 우려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4개월 뒤인 2017년 3월 김 전 연구관에게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을 전합 회의 안건목록에 다시 포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소부와 전합을 오가며 선고가 미뤄졌다. 5월에는 소부에서 판결문 초안까지 나왔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개인청구권 소멸 여부에 의견 불일치가 있다”며 다시 전합에 올렸다. 이후 대법원장의 임기 만료가 임박했다는 이유로 사건은 방치됐고 최종 판결은 지난해 11월에 이뤄졌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청와대의 요구를 받고 이처럼 움직였다고 본다. 당시 외교부는 2013년 9~10월 판결의 조기 선고 방지, 정부 의견 반영 기회 마련, 사건의 전합 회부 등 3가지를 행정처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징용 피해자 측은 철저히 배제됐다. 전범기업 측을 대리한 김앤장법률사무소의 한상호 변호사도 지난 18일 ‘김앤장도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추진한 적이 있었느냐’는 양 전 대법원장 측 질문에 “법원의 소송 지휘를 받아 협조하기로 했던 것”이라며 당시 행정처의 개입 정황을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