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밀알, 15년여 만에 ‘세계기구’라는 튼실한 열매

입력 2019-09-25 00:05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가 1995년 11월 서울 동작구에 세계밀알연합회 사무실을 개소하며 진행한 감사예배에서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세계밀알연합 제공

출국 10년 만인 1994년 7월 한국에 돌아왔다. 미국으로 건너간 두 가지 목적을 나름 이루고 온 셈이다. 이제 또 하나의 과제는 한국과 미국의 밀알을 법적으로 묶는 일이었다. 둘 다 같은 목적과 정신으로 세워졌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는 관계였다.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 태동할 세계의 모든 밀알선교단이 하나가 돼 세계장애인 선교를 감당하는 것은 밀알에 내려진 지상과제였다.

이윽고 한국밀알선교단과 미주밀알선교단을 하나로 묶어 세계밀알연합회라는 이름으로 95년 3월 출범식을 거행했다. 밀알이 세상에 태어난 지 15년 5개월 만이었다. 정말 공상 같았던,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아 말을 해 놓고 나 자신도 반신반의했던, 그래서 겁나고 두려웠던 그 ‘세계기구’라는 것이 마침내 세워졌다.

초기 세계밀알연합회는 운영위원회 체계였다. 출범식 후 2개월 뒤에 한국 측 운영위원회가 결성됐고 미국 측은 96년 8월 뉴저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국과 미국 측 대표들이 모여 이사회를 발족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세계밀알연합회 회장에 선출됐다.

세계밀알연합회 출범 이후 세계 각지에서의 밀알 사업은 더 활발하게 확장됐다. 미국 내 밀알이 세워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장애인 사역 요청이 끊이지 않았고 세계밀알연합회는 그 요청에 적극 응답했다. 97년 1월 북가주밀알(17일)과 남가주밀알(19일)이 이틀 차이로 설립됐다.

이 총재(왼쪽 세 번째)가 2003년 3월 방북 당시 평양 봉수교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계밀알연합 제공

2000년엔 애틀랜타, 2001년엔 시애틀에서 각각 밀알이 설립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각 지역의 밀알이 세워질 때마다 원근을 떠나 장애인 사역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 늘 자리를 지켜줬다.

미국이 아닌 지역에 최초로 밀알 지부가 세워진 건 토론토였다. 미국에 있는 동안 수차례 방문해 여러 장애인 그룹과 활발하게 소통했던 지역이었다. 유럽밀알의 경우 계획적인 노력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우연하게 벌어진 상황이 조금씩 사역에 대한 구체화로 이어졌다. 94년 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코스테(KOSTE) 집회 강사로 참가했다가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유럽에 밀알을 세우면 헌신하겠다”는 제안이 늘면서 이를 위한 정기 기도회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유럽밀알 설립으로 이어졌다.

북한 방문과 북한 장애인

밀알은 본래부터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다른 나라 장애인에게도 사랑을 나누는데 동족인 북한 장애인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2002년 11월쯤 당시 세계밀알연합회 이사이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이셨던 한명수 목사님이 북한을 방문한다는 말을 듣게 됐다. 나는 간곡하게 부탁을 드렸다.

“목사님, 이번에 가시면 밀알이 북한의 장애인을 돕고 싶어한다는 말을 꼭 전해주시고 우리가 휠체어를 갖고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제안해 주십시오.”

간절함은 컸지만 실제로 그 일이 성사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은 그 일을 해내셨다. 한 목사님은 밀알의 방북이 성사되도록 최선을 다하셨다. 평소 장애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가를 몸소 보여주셨다.

세계밀알연합회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초청을 받아 2003년 3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햇다. 나는 분단 이후 북한을 방문한 최초의 장애인으로 기록됐다. 전동 휠체어를 포함해 휠체어 100대를 가져갔는데 분단 이후 남한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최초의 휠체어였다. 북한사람들은 장애인인 내가 세계적 기구인 밀알의 리더라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방북 기간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세계 각국의 장애인 관련법이나 제도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해 줬고 북한에서 ‘불구자’라 부르는 호칭을 ‘장애인’으로 바꿀 것도 권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우리의 얘기에 매우 흥미를 보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일행이 떠난 뒤 3개월여 후 북한은 처음으로 ‘장애자 보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장애인 관련법을 제정했다.

2003년 11월 2차 방북, 2004년 9월 북한장애인 지원물품 북송 등 북한 장애인을 위한 교류와 협력이 기적처럼 이어졌다. 밀알의 방북과 북한장애인 지원이 지니는 의미는 작지 않다. 그동안 대외적으로는 장애인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북한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간접적으로나마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또 밀알의 방북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북한장애인을 위해 기도하고 협력할 창구를 마련하게 됐다. 분단 후 처음으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장애인 관련 의향서를 체결했다는 점도 값진 성과였다.

총신대와 사회복지학과

나 자신에게 밀알의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사명감으로 감당했던 일이 학교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책임 분야에 소극적이었던 총신대를 깨우고 싶어 사회복지학과를 개설하는 데 앞장섰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회복지학과는 분명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귀한 통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재서 박사

교수진과 이사들을 설득하고 교육부를 드나들며 2001년 여름 대학과 대학원을 동시에 인가받았다. 신학과 교수로서 사회과학과 실천신학 관련 과목들만 가르쳤다면 몸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조금 바쁘고 고되더라도 여러 형태로 학교와 사회, 교단 안에서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세계밀알연합회의 활동은 지금도 장애인 선교, 장애인 복지, 장애인 인식개선 현장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부족한 자를 귀하게 쓰시고 세계밀알연합회를 쉼 없이 은혜의 도구로 쓰고 계신 하나님을 향한 기대로 내일을 또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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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