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뉴욕 퀸스에서 윌리엄 더들리 뉴욕 연준 총재가 지역 주민들에게 소비자물가가 하락하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한 주민이 “총재님은 마지막으로 식료품을 직접 사보신 게 언제입니까”라고 물었다. 더들리 총재는 식료품 가격이 오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락하는 품목도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마침 당일 출시된 애플 아이패드2가 아이패드1보다 2배의 성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가격은 동일하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그러자 청중 속에서 큰 웃음과 함께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한 명이 소리쳤다. “아이패드는 먹을 수 없잖아요!” 경제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물가와 체감물가 간의 괴리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8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일각에서는 디플레이션 진입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폭염 등으로 크게 올랐던 농축수산물 가격 등 공급 측 요인의 기저효과로 향후 2~3개월 물가 하락 폭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커 한동안 디플레이션 논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들에게 디플레이션 논쟁은 뉴욕의 시민들처럼 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한국은행이 전국 2500가구를 대상으로 한 8월 소비자동향 조사에서 소비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지난 1년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1%에 달했다. 체감물가는 여전히 2%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띄게 오른 식당 가격표나 택시요금, 작아진 과자봉지 등을 생각해보면 쉽게 수긍이 간다.
높은 체감물가를 아직은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디플레이션은 물가 수준이 상품과 서비스 전방위에 걸쳐 장기간 하락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실제 1990년대 중반부터 오랜 기간 디플레이션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한 1995년 당시 434개 소비자물가 구성 품목 중 160여개의 공업제품과 40여개의 농축수산물 가격이 하락했으며 2002년에는 67.2%에 달하는 품목에서 가격이 하락하는 등 가격 하락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8월 중 460개 구성 품목 중 공업제품 76개, 농산물 36개 등 32.8%의 품목에서 가격이 하락했으나 공업제품 135개, 개인서비스 96개 등 60%의 품목은 가격이 올랐다. 소비자들이 여전히 물가가 오르고 있다고 느끼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여기에다 일본의 경우 주가와 지가 등 자산 가격 폭락이 디플레이션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분명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디플레이션 우려를 기우로 간주해 버리기는 걱정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8월 물가상승률인 2.1%는 지난해 말보다 0.4% 포인트나 하락한 것이다. 최근 수년간 체감물가상승률이 2.5% 수준을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물가 하락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가격이 하락한 품목의 수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가격 하락 품목이 122개, 전체의 26.5%에서 151개, 32.8%로 증가했다. 가격 하락 품목이 늘어나는 가운데 소비자들의 체감물가도 점점 낮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파이낸셜타임스에서 ‘디플레된 세대(Deflated generation)’라는 특집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90년대 중반에 태어나 물가가 하락하고 활력이 떨어지기만 한 경제에서 살아온 일본의 20세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위축된 이야기였다. 디플레이션까지는 아니더라도 0%대의 저물가가 지속하면 우리 경제도 활력이 떨어지고 저성장-저물가의 악순환에 빠져들 수 있다. 혹시라도 디플레이션 심리가 확산된다면 이를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재정·통화 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더불어 디플레이션 논란을 무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지속 성장을 위한 종합적인 정책 대안을 모색하는 논의의 장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