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야 학회가 열리는 도시에 도착했다. 어두운 도시는 한국과는 달라서, 늦은 저녁시간에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었다. 골목 사이에 위치한 카페를 간신히 찾아 한숨 돌릴 겸 커피를 시켰다. 손님이 없었던 터라 마지막 손님인가 싶어 약간 눈치를 보며 앉아 있는데, 이곳 주민인 듯 편안한 차림의 한 노인이 들어와 익숙한 손짓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복잡한 일들로 집에서 잠시 나온 것이든가, 친구를 기다리시는 막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어두운 밤거리를 뚫고 성큼성큼 들어와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하루는 주말에 당직을 서고 나오다 출출하여 패스트푸드점에 들렀다. 자리를 찾느라 고개를 돌리니, 벽 쪽 한 테이블에 회색 하나 섞이지 않은 하얀 머리를 곱게 묶은 할머니께서 음료잔을 옆에 두고 두꺼운 영문 소설을 열심히 읽고 계셨다. 장난을 치며 시끌시끌하게 음식을 먹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단도리하느라 바쁜 부모들, 서로 비속어를 섞어가며 떠들썩한 학생들 사이로 상당히 이질적이지만 어딘가 마음을 뺏기는 풍경이었다. 할머니는 책이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주변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몰입하여 책장을 넘기다가, 누군가의 연락을 받으셨는지 더욱 즐거운 표정으로 책을 가방에 넣고 일어나셨다.
지금은 비록 일상과 업무에 치여 주말에도 일거리를 들고 집과 직장을 오갈 뿐이지만, 나 역시 염색으로도 해결이 안 될 만큼 머리가 센 날이 되면 과연 그렇게 커피와 문화,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는 단단함을 지닌 노인이 될 수 있을까. 젊어서의 실수와 오해, 자책과 한숨으로 부끄러운 시간 모두를 하나하나 꼭꼭 씹어 소화하며 쌓인 시간들. 그 시간들이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의 문화가 되어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어른을 만드는 것일 텐데. 돈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같은 커피나 음료수, 같은 책을 들었다고 같은 높이의 어른일 수는 없을 텐데. 한 해가 익어가는 가을이 시작되었다. 나도 이제는 성장만 하는 나이가 아니다 보니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나는 어떤 어른인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