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정모(25·여)씨는 사회초년생인데도 적금 계좌를 10개나 갖고 있다. 거래은행은 3곳에 이른다. 곧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이 있어 거래은행 외에 특판상품을 내놓는 곳이 있는지 찾고 있다. 정씨는 “금리가 너무 낮아서 만기가 짧은 적금 상품을 여러 곳에 소액으로 분산 투자하고 있다”며 “고금리 특판상품이 출시될 때마다 갈아타면서 재테크를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저금리 시대에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는 ‘파이낸셜 노마드(Financial Nomad)’가 급부상하고 있다. 금리, 부가 서비스 혜택에 따라 여러 금융회사를 옮겨 다니는 고객이다. 금융권에선 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구애에 나섰다.
‘고객 모시기’에는 산업 간 경계도 허물어지고 있다. KB국민은행은 다음 달 이동통신사와 협업해 내놓는 가상이동통신망(MVNO) 사업의 브랜드명을 ‘리브M’으로 정했다고 17일 밝혔다. 다른 산업군에 비해 고객 이탈이 적은 이통사와 손을 잡으면 장기 고객을 더 유치할 수 있다는 셈법이다.
‘고객 감동’을 앞세우는 은행도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 10일 ‘소호(SOHO) 성공지원 센터’를 열었다. 단발성에 그쳤던 자영업자 지원 사업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영업자 멘토링 전문프로그램을 지원해 이들을 충성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생애 주기별로 상품을 연계해 고객과 거래를 유지하는 은행도 등장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6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시니어 플러스 우리 패키지’를 출시했다. 가입했던 적금 상품이 만기되면 자동으로 연금 상품으로 연결되는 식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해외 은행도 마찬가지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3개월 계좌 잔액 평균을 내고 차등적으로 고객에게 우대금리 등 혜택을 준다. 미국 유타주의 지방은행인 시온스뱅크(ZB)는 자녀가 학교에서 A학점을 받아올 때마다 계좌에 1달러를 입금해준다. 미성년자 고객까지 평생 고객으로 공략하겠다는 전략이다.
파이낸셜 노마드는 새로운 계층이 아니다.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금융권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이들이 다시 급부상한 배경에는 ‘핀테크’(금융+정보통신기술)와 ‘오픈뱅킹’(은행 간 고객 데이터 공유)이 자리 잡고 있다.
금융 소비자들은 핀테크와 오픈뱅킹을 이용해 금융 정보에 접근하기 쉬워졌다. 금융 당국이 주도하는 오픈뱅킹 사업은 각 은행 모바일뱅킹의 경계마저 허문다. 금융상품을 한눈에 조회할 수 있는 뱅크샐러드(레이니스트)의 ‘통합자산관리 서비스’, 금융감독원의 ‘파인(FINE)’, 금융결제원의 ‘계좌이동서비스’가 대표적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2~3년 전만 하더라도 모바일뱅킹 가입자 수를 늘리려고 경쟁했는데, 정작 은행에 필요한 건 ‘오래 남을 고객’이더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파이낸셜 노마드 시대의 도래를 반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파이낸셜 노마드는 똑똑해진 소비자를 의미한다”며 “앞으로도 은행 간 건전한 경쟁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소비자는 더 나은 금융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현정 KB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은행은 빅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특성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으로 고객과의 관계 유지에 더 힘쓰게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