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지역 리포트] 국채보상운동 정신, 오늘도 대구서 살아 숨쉰다

입력 2019-09-17 20:25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모습. 대구의 정신인 국채보상운동을 시민들이 기억하도록 대구 중심부에 조성했다. 대구시 제공

최근 한·일 무역갈등으로 ‘노(NO)재팬’ 운동이 확산되면서 일제강점기 민중의 힘으로 국채를 갚아 나라를 구하려 했던 ‘국채보상운동’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구한말 대구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 정신은 현재에도 대구에서 시작돼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대구의 정신인 국채보상운동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대구가 중심이다. 이 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애국지사 서상돈 선생 등에 의해 시작됐다. 일제가 강제로 빚지게 한 국채 1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애국운동이었다. 당시의 1300만원은 현재 수천억원 이상의 가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2월 21일 대구 서문시장 인근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게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민족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민족지도자뿐 아니라 농민, 상인, 인력거꾼, 백정 등 다양한 계층이 동참했다. 남성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모은 돈을 의연금으로 냈고 여성들은 각종 패물을 내놨다. 고종도 금연에 참가하는 등 전 국민의 25%가 동참했다고 한다. 특히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비롯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 한국 최초 근대 여성운동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일제의 방해로 결국 그 뜻이 좌절되기는 했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기초가 됐고 이후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는 평가다.

역사교과서에서나 간략하게 내용을 찾을 수 있던 국채보상운동을 다시 깨운 것 역시 대구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건 1990년대 초다. 1993년 3월 한국민족운동사 연구회와 대구지역 언론사가 공동으로 국채보상운동 학술세미나를 연 것을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90주년 기념 심포지엄과 대구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위원회 및 100년 기념사업회 구성(1997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준공(1998년),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의 창립총회 개최 및 김영호(경북대 명예교수·전 산업자원부 장관) 초대 회장 선임(2002년) 등의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대구시와 민간이 주도하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된 국채보상운동 정신 깨우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이후에도 대구시와 기념사업회가 각종 포럼과 세미나 등을 개최하며 국채보상운동 알리기에 나섰고 2009년 국채보상운동 희귀자료 25종을 개인과 단체로부터 구입해 국채보상운동기념관(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내·2011년 10월 개관)을 지었다.

김지욱 기념사업회 전문위원은 “1990년대 초 서울 등에서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구시와 김영호 회장이 이 운동이 시작된 대구에서 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며 “사업 초기에는 사업의 당위성을 대구시민과 지역인사들에게 알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고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지을 때는 자금 모금 등 예산 확보가 가장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17년 10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는 경사도 있었다. 등재된 기록물은 1907~1910년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들로 우리나라 세계기록유산 중 유일한 근대 기록물이다.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를 기록한 수기 12건, 운동의 확산과 파급을 적은 수기 75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일제 기록물 121건, 언론 보도 2264건 등 2472건으로 구성됐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중국(1909), 멕시코(1938), 베트남(1945) 등지에서도 국채보상운동과 유사한 시민연대 운동이 일어났는데 우리나라의 국채보상운동이 시기상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위)와 국채보상단연회 의연금 모금장부. 대구시 제공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는 대구시, 기념사업회, 대구시민들이 함께 만든 쾌거다. 대구시 관계자는 “2014년 11월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이듬해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 국회의원,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이 참여한 추진위원회 보고회와 시민참여 발대식이 열렸다”며 “이후 영문판 홈페이지 구축, 대시민보고회, 100만인 서명운동 등을 벌이며 분위기를 띄웠고 3년여 만에 등재에 성공하게 됐다”고 밝혔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 세계화 사업의 전진기지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먼저 대구시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인근 중앙도서관을 리모델링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아카이브관과 도서관, 박물관, 문화시설 등이 모두 들어가 있는 시민체험형 복합문화시설(라키비움)을 조성할 계획이다. 기념사업회는 기록물 외국어 번역,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국제교류 확대, 다른 지방자치단체와의 공동 연구, 북한과의 공동 연구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상길 대구시 행정부시장은 “아카이브관 조성과 중앙도서관 리모델링 등을 위한 실시설계비를 내년도 정부예산안에 담았다”며 “대통령도 국채보상운동 정신의 세계화를 공약한 만큼 최종 국비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신동학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기록물 더 발굴하고 세계와 소통할 방법 찾을 것”



“예나 지금이나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은 대구입니다.”

신동학(사진)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17일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는 점과 현재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본부)가 대구에 있다는 점 모두 대구시민들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2002년 국채보상운동 발굴·복원·전파를 위해 민간 주도로 탄생했다. 신 대표는 2014년부터 상임대표를 맡았다. 그는 60여년 동안 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해온 여성리더로 대표취임 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해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는 “앞서 전임 대표와 대구지역 인사들이 역사교과서에서 한줄 정도만 언급되던 국채보상운동을 현실로 끄집어내 사람들에게 알려 국채보상운동 확산 기반을 마련했다”며 “국채보상운동의 세계화를 위해 국제적인 인정이 필요했고 대구시, 시민들과 함께 노력해 유네스코 기록물 등재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네스코 등재가 국채보상운동의 세계화 사업의 시작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고도 했다. 신 회장은 “대구시가 보유한 기록물은 25점뿐이고 나머지는 서울의 공공기관 등 전국 13개 기관에 분산돼 있다”며 “대구에서 전국으로 번진 만큼 다른 지역의 개인, 기관, 단체와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발굴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 회장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 찾는 게 또 하나의 과제라고 했다.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쉽게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자료를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하고 이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만들 계획”이라며 “국채보상운동과 이 정신을 이어받은 IMF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유사한 형태의 시민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조사할 생각이다”고 설명했다.

신 회장은 국제사회와의 교류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각종 국제세미나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개인, 단체, 기관들과 국제교류를 확대하고 국제기구도 유치해 대구를 국채보상운동 세계화의 전진기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구=최일영 기자 mc10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