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진압 위협에도 시민 분노 ‘불길’… 백기 든 홍콩 정부

입력 2019-09-04 21:25 수정 2019-09-05 04:03
홍콩 도심의 한 건물에 설치된 뉴스 스크린에서 4일(현지시간) 오후 6시 캐리 람 행정장관의 송환법 공식 철회 발표가 나오고 있다. 람 장관이 송환법 철회를 공식 선언했지만 시위대의 5대 요구 사항 가운데 하나만 수용한 것이어서 홍콩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로이터연합뉴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4일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철회를 공식 선언한 것은 들불처럼 번지는 홍콩 시민들의 분노에 백기를 든 것으로 평가된다. 홍콩 경찰이 시위대에 최루탄과 물대포, 실탄 경고사격, 중국 본토 병력의 무력시위로 위협했는데도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격화되자 홍콩 정부가 결국 물러선 것이다. 이는 지난 6월 9일 103만명의 홍콩 시민이 모여 ‘송환법 철폐’를 외친 지 88일 만에 얻어낸 결실이다.

홍콩 시위대는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79일간 벌였던 ‘우산혁명’의 실패를 밑거름으로 조직적인 싸움을 벌였다. 시민들의 불편이 불가피한 평일을 피해 주말에 시위를 집중했고, 중국의 무력개입 위협에는 폭우속 평화시위로 맞섰다. 하지만 뚜렷한 지도부가 없는 시위대는 홍콩 입법회 청사에 난입해 기물을 파손하고, 홍콩국제공항을 점거해 초유의 ‘공항 폐쇄’ 사태를 야기했다. 또 중국 국기를 불태우거나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는 등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곡예 끝에 결국 시위대는 ‘행정장관 직선제’는 얻어내지 못했지만 송환법 철회를 이끌어냄으로써 절반의 승리를 거뒀다.

실제 람 장관은 초기에 송환법을 강행하려다 시위가 격화되자 시위대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자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람 장관은 지난달 24일 정치인과 전직 고위관료 등 19명의 홍콩 유력 인사들과 만난 후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람 장관에게 송환법 공식 철회 등 시위대의 일부 요구를 수용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람 장관은 이어 지난주 홍콩 사업과들과 가진 비공개 회동에서 “할 수 있으면 그만두고 싶다”며 자괴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본토에 대한 홍콩인의 두려움을 거론하며 “송환법을 추진한 것은 매우 어리석었다”고 말했다.

람 장관이 8월 7일 이전에 중국 정부에 송환법 철회를 건의했으나 거부당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람 장관은 시위대의 5가지 요구사항 중 송환법 폐지가 시위대 내의 온건파를 회유해 홍콩 정세를 가라앉힐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고 중국 중앙정부에 이를 제안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람 장관의 제안을 즉각 거절하며 시위대의 그 어떤 요구에도 응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도 시위대를 진압할 수는 있지만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중국 본토의 무력개입이 이뤄지면 홍콩의 금융중심지 기능이 붕괴되고 서방과의 관계 단절로 중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가장 신경을 쓰는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변수로 작용했다. 큰 축제를 앞두고 홍콩 거리에서 중국을 상징하는 오성홍기가 불태워지고, 미국 성조기가 홍콩 시내에 나부끼는 상황을 중국 정부도 계속 방치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중국 정부도 건국 70주년을 앞두고 작전상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문제는 홍콩 시위대의 향배다. 시위대는 이미 ‘행정장관 직선제’를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건 상황이어서 시위대가 람 장관의 발표를 전적으로 수용할지 미지수다. 홍콩 시민들은 시위 과정에서 극도의 반중 정서를 드러내며 ‘홍콩 독립’ ‘시대 혁명’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송환법 공식 철회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 반중 시위가 계속된다면 중국 정부의 대응도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