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LA서 수련회 인도 요청… “밀알 심자” 계획이 현실로

입력 2019-09-04 00:03
이재서 총재(뒷줄 가운데)가 1994년 5월 미국 럿거스대에서 사회복지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찍은 가족사진. 세계밀알연합 제공

LA에 밀알의 씨앗이 처음 떨어진 것은 워싱턴DC보다 1년 이른 1990년 9월이었다. 당시 LA에서 목회하던 김홍덕 목사님이 본인이 담임하는 빛과소금교회 여름 가족수련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해 오면서 나는 처음으로 LA를 방문했다. 박사과정 다섯 번째 학기로 마지막 코스워크를 하고 있었지만,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다녀오기로 했다.

처음엔 LA에 밀알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사람이 상상하는 수준을 초월해 밀알의 새로운 씨앗이 돼 주신다. 빛과소금교회 집회에서는 세 번의 설교를 했는데 그중 한 번은 장애인 이야기를 했다.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개인적으로 장애인 문제 상담을 요청해 오기도 했다.

그때야 LA에도 밀알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LA에 머무는 동안 한국에서부터 알던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모두 일곱 곳에서 설교와 강의를 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동역해줄 만한 사람도 사귀었다. 그들에게 LA에도 밀알이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90년 9월 13일 LA의 한 음식점에서 18명이 참석한 가운데 LA장애인선교회(남가주밀알선교단의 전신)가 발족했다. 초기의 LA밀알은 운영위원회장을 맡았던 이성엽 목사와 부회장으로 섬겨주신 김성득 김흥덕 목사님 등의 노력에 힘입어 토대를 닦았다.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갖고 기금도 모으면서 여러 형태의 활동을 펼쳤다.

출범 후 3년여간 활발하게 발전해가던 LA밀알은 93년 봄을 지나면서 유감스럽게도 주요 이사들의 이주와 실무자의 개인적 사정으로 활동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몇 년간은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였다. 워싱턴 본부에서 보내주는 밀알 소식지를 회원과 교포들에게 나눠주는 정도의 일밖에 하질 못했다.

하지만 초기 멤버들의 가슴에는 밀알을 아끼고 장애인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간직돼 있었고 그들이 성의껏 나누는 밀알 소식지를 통해 LA 교포들은 장애인 선교 단체로서 밀알을 인식해 갔다.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후일 LA밀알을 재건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 토양 위에서 2~3년 뒤 LA밀알의 불꽃은 다시 타올랐다. 재점화의 주역은 이미영 사모와 한규삼 목사 등이었다.

꺼져 가는 LA밀알의 불꽃을 다시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신기한 방법을 예비하셨다. 나는 박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96년 3월부터 총신대 정교수가 돼 첫 학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당시 내가 공부했던 럿거스대에서 박사과정 중이었던 한 집사님이 전화로 “잘 아는 한 가정이 LA로 이사를 가는데 거기서 어느 교회를 다니면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가정에는 지은이라는 장애아가 있다는 말도 했다. 이 사모의 교회를 소개해줬지만 많은 교회들 중에 내가 추천한 교회에 꼭 나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그 가정은 이 사모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 사모는 같은 교회에서 지은이와 자연스레 소통하며 LA에도 밀알이 더 활성화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분위기는 한국에 있는 내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들의 만남에서 발생한 스파크가 꺼져가던 LA밀알의 불꽃을 재점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꼭 2년 만인 96년 여름 다시 미국을 방문했다. 여러 밀알 지부들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동부에 있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한규삼 목사님이 그 무렵 LA에서 목회하고 있었던 것은 여호와이레였다. 한 목사님은 LA에 밀알을 다시 세우는 것을 환영했고 준비과정에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분의 수고로 마침내 8월 5일 LA밀알선교단 재창립준비위원회 결성모임이 개최됐다. 참석 당시 뉴저지밀알을 맡고 있던 한종세 총무 외에 한규삼 목사, 이미영 사모, 최우성 집사 등 10여명이 참석했다. 임원을 뽑고 정식 창립은 이듬해인 97년 1월에 하기로 하고 12월까지는 준비위원회 체제로 활동하기로 했다.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뒷줄 왼쪽 두 번째)가 1997년 1월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열린 남가주밀알선교단 창단예배에서 순서자로 참석했다. 세계밀알연합 제공

예정대로 97년 1월 19일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남가주밀알선교단 창단 예배가 개최됐다. 나 외에도 한국에서 세계밀알연합 이철우 부이사장, 박근수 이사 등 다수의 회원과 강원호 정택정 목사 등 밀알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LA지역 밀알운동의 재출발을 축하해줬다.

처음 한두 달은 한규삼 총무, 이미영 서기, 최우성 회계 등 준비위원회 임원들이 그대로 이끌어 가다가 3월에 뉴저지밀알 한종세 총무를 남가주밀알 책임사역자로 임명해 보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안정된 기틀 위에서 발전해 갔다. 한 총무가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그해 12월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면서 후임으로 이상만 목사가 98년 1월 파송됐다.

이재서 박사

LA밀알은 한때 세계밀알연합의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다. 미주의 다른 지역 밀알이 한창 성장할 때 활동이 주춤해져 마음이 아팠던 사역지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더 귀하게 쓰셨다. 하나님께서 피우시기로 계획한 불꽃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걸 밀알운동이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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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