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훈 목사의 전도군사학교] “복음 앞에 자존심 무의미… 내 마음의 벽 허물었을 때 사람들 다가와”

입력 2019-09-02 00:05
이수훈 당진동일교회 목사가 지난 22일 충남 당진 버스정류장에서 지역 어르신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당진동일교회 제공

벽은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추위와 더위를 막고 짐승과 벌레, 도적이나 강도, 불편한 시선을 막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명 보호막인 셈이다. 그러나 그 벽이 때로는 사람을 구속하는 역할을 한다. 감옥도 벽으로 둘러친 곳이며 안방도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 벽 안에 들어가 안심하고 보호를 받고 쉼도 얻고 안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벽이 가는 길을 막는 날에는 문제가 다르다.

그 벽이 영적으로 작동할 때 더욱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영적인 벽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벽보다 훨씬 무섭게 우리의 삶을 구속한다. 그 벽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생겨났다. 아담이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던 그 날부터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린 그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제의 벽은 온 인류를 불행의 올무에 걸어버렸다.

불순종하는 순간, 사단의 말을 듣고 따르는 순간, 다시 말해 죄를 범하는 순간 생겨난 그 장벽이 인류의 생명의 빛을 가로막았다. 그 결과 어둠이 깊어졌고 그 어둠은 죽음을 낳았다. 종신토록 땀을 흘려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인류는 그렇게 어둠에 휘말리고 말았다. 빛을 잃은 사람들은 결국 어둠 속을 방황하게 됐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9) 어둠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를 누가복음은 “가난과 포로 됨과 눈먼 것과 눌림”(눅 4:18)이라 표현한다.

이 어둠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물러가지 않는다. 땅을 치고 발을 굴러도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 어둠에 갇힌 사람들은 답답한 삶을 답답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그 안에는 기쁨이 없고 달려도 고통뿐이다. 넘어지고 상하고 슬픔뿐인 길을 달려가고 있는 셈이다.

이 어둠을 물리치신 분이 오셨다. 저주의 벽을 무너뜨리신 분이 오신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가망이 없는 우리가 생명의 빛을 만나게 됐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그 길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몸을 찢기시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벽을 무너뜨리셨다. 성소의 휘장이 찢기신 사건은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피로 인해 인종과 신앙과 모든 사람 사이에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신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 사도는 복음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됐음을 고백한다. 율법 안에 갇혀있던 그가 예수 안에 자유를 알게 된 후 그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 안에 살고 계심을 고백하게 됐다.(갈 2:20) 그리고 그는 한 영혼을 얻기 위해 혈통과 모든 사람 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오직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스스로 종의 길을 선택했다고 고백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나는 지극히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많았다. 낯선 곳에 가는 것과 낯선 사람을 만나는 그 일이 정말 어려운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알고 난 후 이 문제가 큰 고민이었다. 사람의 낯을 피하는 것에 익숙했던 내가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문제가 해결됐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사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예수님 믿는 믿음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낯섦은 생후 8개월쯤에 생긴다. 친숙한 엄마나 가족 외의 사람을 경계하고 회피하는 유아 성장 과정의 일이다. 그런데 내 평생 이것을 뛰어넘지 못해 사람을 두려워하고 어려워 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겁내지 않게 된다. 끔찍한 상황들이 계속되는 가정들을 많이 만났다. 전도하러 다니면서 극단적인 선택과 도박·알코올·게임중독, 가정폭력, 이혼 등 말로 하기 어려운 가정들을 많이 만났다. 그 어떤 위로의 말로도, 인간적인 사랑과 도움도 그 순간뿐인 일들이 많았다. 길이 없는 분들께 당당히 어디서든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능력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굴이 없다. 약간 미친 사람처럼 체면을 버렸다. 복음 앞에 사는 사람은 자존심도 의미가 없다. 내 마음의 벽을 내가 허물고 다가설 때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

요즘은 나이 들어감의 축복이 뭔가를 알게 돼 기쁘다. 젊어서는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들어 이제는 누구든지 바로 말을 걸어도 부담이 적고 쉽게 대화가 열린다. 참 감사한 일이다. 사람의 체면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낯가림의 벽을 허물면 다 이웃이요, 전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림을 확인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이수훈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