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이 홍콩 시위 진압을 위해 긴급법을 발동하는 방안을 거론해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긴급법은 홍콩 행정장관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어 사실상 ‘계엄령’에 가깝다. 홍콩 시위가 27일로 80일째를 맞아 79일간 이어졌던 2014년 ‘우산혁명’의 기록을 넘어선 상황에서 홍콩 정부가 시위대에 보내는 사실상의 최후 통첩으로 해석된다.
28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캐리 람 행정장관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폭력과 혼란을 멈출 수 있는 법적 수단을 제공하는 홍콩의 모든 법규를 검토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홍콩 정부가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를 검토하고 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이렇게 답했다. 긴급법 적용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에드워드 야우 탕와 홍콩 상무경제발전국장도 같은 날 “긴급법 시행이 홍콩의 국제무역중심지라는 지위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며 “국제사회도 이해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긴급법은 비상상황이나 공중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 행정장관이 홍콩 입법회의 비준을 거치지 않고 공중의 이익을 위해 긴급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긴급법이 시행되면 행정장관은 체포, 구금, 추방, 압수수색, 재산몰수, 출판·통신제한, 운수제한 등 무소불위의 ‘비상대권’을 갖게 된다.
홍콩 역사에서 긴급법이 적용된 것은 1967년 7월 반영(反英)폭동 때뿐이다. 66년 노사 분규가 발생해 충돌이 계속되다 67년 7월 대규모 폭동이 터지자 홍콩 정부는 긴급법을 발동했다.
홍콩 야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민주당의 제임스 토 의원은 “긴급법 적용은 홍콩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라며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하고, 평화적인 집회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홍콩대 법학 교수인 사이먼 영은 “긴급법이 제정된 1922년 당시는 홍콩과 광저우의 총파업으로 전시 상태와 같았다”며 현재 홍콩 사태와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홍콩 명보는 긴급법 적용에 중국 중앙정부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고 전했다.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판공실의 장샤오밍 주임은 이달 초 선전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홍콩 행정장관에게 계엄령 발동 권한을 부여한 ‘공안조례’를 거론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의 치안 총책임자인 자오커즈 공안부장도 지난 26일 광둥성을 방문해 폭력과 테러, 침투활동 등을 엄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가 국제적인 비난이 불가피한 본토의 무력개입보다는 홍콩 자체의 긴급법을 활용해 사태 수습을 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이 신중국 수립 70주년인 10월 1일 이전에 시위를 진압하려 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홍콩 민간인권전선 주도로 오는 31일 열릴 예정인 대규모 집회가 긴급법 적용 여부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특히 이날은 2014년 8월 31일 중국이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합의를 어기고 간접선거제를 결정한 지 5년째 되는 날이다. 당시 간선제 발표는 79일 동안 이어진 홍콩 ‘우산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한편 홍콩 경찰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6월 9일 이후 80일 동안 시위 진압 과정에서 883명을 체포해 136명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거된 최연소 시위자는 12세이며, 부상한 경찰관은 205명으로 집계됐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