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이 사울 왕을 대신할 자를 찾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의 용모를 보면서 여호와가 기름 부으실 자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여호와는 외모보다 그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내면보다 화려한 겉모습, 그럴듯한 요건 등에 열광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사회적 지위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크고 유명한 교회를 다니면 자신의 신앙 수준도 덩달아 수준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또 개척교회 등 작은 교회를 섬기면 신앙의 수준도 낮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양극화 현상을 이것만으로 단순화시켜 생각할 순 없지만 성도들도 눈에 보이는 것과 사람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나니아는 다메섹에서 눈이 먼 사울을 위해 기도해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핍박한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사울이 다메섹으로 온 이유를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행 9:13~14)
그러나 하나님은 생각지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초라하고 형편없어 보여도 그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윗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사무엘의 방문에도 다윗을 집으로 부르지 않았던 아버지 이새의 실수나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한 소문과 평가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반문을 제기하는 것 같은 실수가 우리에겐 반복돼선 안 될 것입니다.
가출 청소년들을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님과 폭주족을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역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이 이들을 향한 기성교회와 성도들의 낙인, 선입견 때문에 힘들다고 토로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셨고 박해자 사울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틀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 겨자씨 비유가 있습니다. 겨자씨는 다른 것들보다 작지만 심기우고 자라나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에게 쉼도 주고 그늘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난다는 것이고, 자란다는 것은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상황이나 환경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그것에 지배받지 마십시오. 꿈꾸고 최선을 다하면 오히려 열악한 현실들이 큰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도 민감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 가운데서 내가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입니다.
모든 인생의 경영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금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선 안 됩니다. 내 앞의 초라한 사람이 다윗일 수 있고, 내 앞의 완악한 사람이 다메섹의 사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은 보이는 것보다 바라는 것에 집중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권오진 목사(서울 목장교회)
◇권오진 목사는 ㈔남산기독교문화살리기운동본부 상임총무로 2012년부터 중소형교회 청소년부를 세우기 위한 연합사역과 기독교 문화를 위한 실제적인 사역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서울 목장교회 부목사로 교육과 문화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