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랜만에 소설집을 내놓은 것 아니냐”고 묻자 작가는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참 게을렀나 보다”며 웃었다. 작가는 바로 소설가 공선옥(56·사진). 최근 그는 중단편 8편을 묶은 소설집 ‘은주의 영화’(창비)를 출간했다. 장편소설을 제외하고 소설집으로만 따진다면 ‘명랑한 밤길’(창비) 이후 1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젊었을 때는 4~5년마다 소설집을 한 권씩 발표하곤 했어요. 그때는 4~5년이 10년처럼 느껴졌죠. 그런데 나이가 드니 이제 반대네요. 10년이 4~5년처럼 지나가고 있어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거 같아요.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1년 전만 해도 옛날처럼 느껴져요.”
공선옥과의 인터뷰는 전화로 진행됐다.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전남 여수, 광주, 서울, 강원도 춘천 등지를 오가며 살았던 그는 현재 전남 담양에 머물고 있다. 그가 이번에 내놓은 소설집은 2010년부터 올해까지 틈틈이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중단편을 묶은 것이다.
특유의 분위기는 신작에서도 여전하다. 전작들이 그랬듯 책에 실린 중단편 상당수에선 사회성 짙은 메시지가 진하게 묻어난다. 표제작인 은주의 영화만 하더라도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건 5· 18의 참극이 개인 삶에 남긴 짙은 얼룩이다. 공선옥은 “은주의 영화는 많은 이야기를 내포한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요즘 쓰고 있는 글의 모태가 돼준 작품”이라며 “이 소설을 눈여겨본다면 다음에 내놓을 작품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어떤 작품 속 등장인물이든 하나같이 아픔이나 결핍을 끌어안고 있다는 점도 공통된 요소다. 하지만 이런 지적을 공선옥은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는 “기자들이 ‘결핍’이라고 말하는 건, 결핍이 아닌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고가 깔려 있어서일 것”이라고 말했다.
수록작 중에서는 ‘오후 다섯시의 흰 달’도 수작으로 꼽힐 만하다. 주인공은 오래전 사고로 아들과 아내를 잃고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퇴임교수 ‘윤’.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다섯 살 소년을 데려다 키우고 싶어 한다. 그는 소년을 보면서 그 옛날 세상을 떠난 아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외로움을 달래고, 잃어버린 삶의 생기를 되찾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년의 아버지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오면서 계획은 무산된다.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사양(斜陽)이 비끼는 휴게소 유리문에 오후 다섯시의 흰 달이 언뜻 비쳤다가 윤이 문을 열자 사라졌다. 곧 해가 질 것이다.” 이런 식의 결말을 두고 공선옥은 “누군가에겐 희미한 희망으로, 어떤 이에겐 서늘한 절망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소설집 끝에 실린 ‘작가의 말’을 펼치니 이런 문구가 눈에 띄었다.
“소설이 세상에서 그리 유용한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는 해도 어쨌거나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앞으로 사는 동안은 소설을 쓰면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소설’로밖에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