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여름은 몹시도 무덥게 시작되고 있었다. 10월에 있는 종합 자격시험(Qualifying Exam)에 대한 부담감은 몸과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시험 범위는 부전공까지 포함해 책 100권 분량이어서 박사과정에서 가장 힘든 관문이라고 불릴 만했다. 혹시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 논문을 안 쓰더라도 그 시험은 통과해야 ‘박사과정 이수’라는 공식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그 여름은 어떤 마음의 여유도 가질 수 없는 진땀 나는 시간이었다.
6월 말쯤 워싱턴DC에 있는 유영렬 전도사(미 해군 군목으로 근무하다 제대하고 현재 LA에서 목회 중)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당시 워싱턴장로교회 청년부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는데 총신대 후배로 학창시절에는 밀알에서 단원으로 잠시 활동한 적도 있었다.
“형님, 이번에 우리 교회 청년대학부 합동 여름수련회를 좀 인도해 주십시오.”
“안돼. 이번 여름에는 전혀 시간이 없어.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오셔서 만나자고 해도 만날 시간이 없어.”
나는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거절했다. 그동안은 교회나 기관에서 강의나 설교를 부탁하면 늘 고맙게 생각하고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만은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처럼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유 전도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튿날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 꼭 형님이 와주셔야겠습니다. 이민 와서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청년들이 많아서 그러니 형님이 꼭 오셔서 특별한 도전을 좀 주십시오. 만일 이번에 안 해 주면 이제부터 형님 안 볼 거유!”
결국 나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민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며 갈등하는 청년들’이라는 말에 책임감 불끈 솟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 한 번 밀알의 역사를 이루는 출발로 이어질 줄은 전혀 몰랐다.
수련회는 7월 3일부터 3박 4일 동안 미국에서도 아름다운 해안으로 손꼽히는 버지니아 비치의 샌드브리지라는 곳에서 개최됐다. 내가 살던 뉴저지 뉴브런스윅에서는 자동차로 해안길을 따라 10시간쯤 가야 하는 거리였는데 세 아이까지 데리고 아내가 운전을 해서 갔다.
청년들은 40~50명 정도 참석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말씀을 전했고 다섯 번의 설교 중 한 번은 장애인 선교에 대해 메시지를 전했다. 밀알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내가 미국에 온 목적 중 하나가 세계 장애인 선교를 위해 미국에도 밀알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것도 간증했다. 청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장애인에 대해선 따로 질문하기도 하고,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던 한 청년은 상담을 해 오기도 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뿌듯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특히 워싱턴 지역에 밀알을 만들면 참여하겠다는 청년들까지 있어 주체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오자마자 시험 준비에 전념해야 했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시험을 통과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는 워싱턴밀알 창립 준비에 돌입했다. 곧 박사학위논문 준비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잠시라도 여유가 있을 때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때마침 워싱턴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워싱턴장로교회 청년 여름수련회 때 장애인 선교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조완휘 형제였다. 그는 언제쯤 워싱턴에 밀알을 만들 거냐고 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해요. 곧 내려갈 테니 관심 있는 청년들에게 연락해 두세요.”
마침내 91년 11월 2일 워싱턴밀알선교단이 설립됐다(첫 이름은 워싱턴장애인선교회라고 했으나 한 달쯤 후 워싱턴밀알선교단으로 개칭). 나는 그날 아침 뉴브런스윅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혼자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저녁 7시쯤부터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마친 후 창립예배를 드렸다. 당시 리버티신학대학원에서 유학하던 강원호 목사가 기도하고 내가 설교했다. 강 목사는 군목으로 복무하다 제대하고 미국으로 와 공부하던 참이었다. 그가 유학 온 목적은 공부에도 있었지만 나와 함께 밀알의 비전을 세계로 펼쳐가기 위한 목적이 더 우선이었다.
설교에 이어 취지와 목적을 이야기하고 정관을 통과시킨 다음 임원을 선출했다. 총 23명이 참석한 창립예배엔 기대했던 대로 워싱턴장로교회 청년들이 다수 참석했다. 그중에서도 조완휘 형제를 중심으로 차재훈 형제 등이 워싱턴밀알의 든든한 주춧돌이 돼줬다.
워싱턴밀알은 총무를 맡은 강 목사의 리더십에 따라 일취월장 발전해 갔다. 그해 11월 말에 한국에서 들어온 한미경 사모의 합류는 워싱턴밀알에 날개를 달아 줬다. 특히 워싱턴 지역 청년들과 매릴랜드대 학생들의 열정적인 참여와 봉사는 워싱턴밀알 활동의 중심이었다. 강 목사가 한국밀알선교단 단장으로 이동함에 따라 뉴질랜드 선교사로서 은총교회를 담임하며 뉴질랜드밀알 단장으로 사역하던 정택정 목사가 98년 7월 30일 워싱턴밀알 2대 단장으로 취임했다.
워싱턴밀알의 출범 과정을 돌아보면 지금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깨닫게 된다. 분명 인간의 마음으로는, 연약한 사람 이재서의 결단으로는 꿰어지지 않을 단추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꿰어진 것이란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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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