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를 타고 홍콩 중심으로 들어갔다. 다음 목표는 국제앰네스티 홍콩지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근처 호텔을 통해 수소문해 그곳을 찾았다. 사무실로 들어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직원들에게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며 도움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틀에 걸친 조사 끝에 내 담당자가 정해졌다. 북한에 계시는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철저히 비공개로 해달라는 내 요구를 받아 준 그는 내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길은 홍콩 정부 기관이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난 홍콩 이민국으로 공식 인도됐다. 그들은 날 ‘상수이 특별수용소’에 가뒀다.
이 수용소는 중국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던 인사들이 중국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넘어왔을 때 외국 망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임시로 수용되는 곳이었다. 한국으로 가는 탈북자들을 다음 절차 전까지 임시 수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내 신상과 탈북 이유, 동기, 홍콩까지 온 경로 등을 조사했다. 어느 나라로 가기를 원하는지도 질문했다. 특히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경로를 자세히 물었는데, 내가 식인상어 출몰지역을 무사히 건너왔다는 말에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심문이 끝난 후 그들은 내 손에 쇠고랑을 채웠다. 일단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소지품도 모두 조사했는데 내게 남은 건 약간의 돈과 성경책 두 권이 전부였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난 노동자, 과학자, 군인, 의사, 지하교회 성도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그중 평성 국가과학원에서 근무했다는 분을 만났는데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보며 매일 기도한다는 걸 알고는 경악했다. 주체사상의 허상에는 동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 후로 그는 ‘예수쟁이, 미친 사람’이라며 나에 대한 소문을 냈고 다른 탈북자들도 웬만해서는 내게 가까이 오질 않았다.
반대로 중국에서 숨어 살 때 내 거처를 마련해주고 선전까지 나와 동행해 준 중국인 주인집 형님 내외 분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됐다. 다시 못 볼 것 같던 그들과의 재회는 16년 만에 이뤄졌다. 난 한국에 온 후 2011년 3월 하나로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을 위해 함께 기도하던 목사님, 장로님들과 함께 중국 투먼의 두만강 가를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북한을 위한 기도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현지 선교사들과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 사연을 듣던 한 선교사가 내게 중국 주인집 형님의 연락처를 아느냐고 물었다. 형님은 가난했기에 전화가 없었다. 난 형님의 처가댁 번호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형님 집 근처에 있는 샹그릴라 호텔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다. 16년 만에 다시 만난 형님 내외분은 당시 내가 그곳에 살 때 갖고 있던 소지품도 모두 갖고 나오셨다. 우린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 형님 내외는 “만약 네가 그 바다를 무사히 건너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도 하나님 믿겠다고 다짐했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난 그들에게 중국 목사님을 소개해줬다. 중국에서 살 때, 같이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권했지만 끝내 가지 않던 그들이었다. 내가 살아 돌아옴으로써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됐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