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고랑처럼 한 땀 한 땀 이어진 바느질 선. 그 위엔 솜방울이 방울방울 매달렸다. 원래 폭신폭신한 솜이지만 왁스에 담갔다 꺼내 표면이 딱딱하게 된 주황색 솜의 표면이 가을날 홍시처럼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리는 것보다는 소꿉장난하듯 만지작거리길 좋아했다던 작가. 그렇게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술 세계의 확장을 추구했던 그는 뭐가 급한지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신경희(1964∼2017·사진) 작가. 그가 떠난 지 2년 만에 유작전 ‘기억-땅따먹기’(9월 10일까지)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에서 판화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판화는 그리는 방식의 회화에 갑갑해 하던 작가의 숨통을 틔워줬다. 판화 수업 때 배운 ‘종이 제작’ 기술을 활용해 직접 만든 종이를 바느질해서 이어붙였고, 그 위에 수지침, 원피스 등 동서양의 다양한 삽화 이미지를 인쇄해 작품 퀼트 시리즈를 만들었다. 선배 작가 오병욱씨는 고인의 작품 세계를 유년 시절 골목에서 해가 지는 줄 모르고 하던 ‘땅따먹기’에 비유하며 “(작품 속에) 따뜻하고 아련한 무엇이 있다”고 평했다.
작가는 국내외에서 총 10차례 개인전을 하고 1996년에는 35세 이하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석남미술상을 받았다. 미술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다. 2005년부턴 대학 강의도 중단하고 오로지 작품에 매달렸다. 작업 방식을 보면 만들기에서 그리기로 변신을 시도하며 꽃을 패턴화한 ‘정원 도시’ 시리즈를 이어갔다. 2010년 유방암 발병을 알게 된 작가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