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해연(55)은 어떤 배역이든 제 것처럼 소화해내는 배우로 꼽힌다. 30여년간 무대를 누비며 다져진 절륜함 덕분일 텐데, 이 작품만큼은 ‘이해랑 연극상’(2015) 등 화려한 수상에 빛나는 그의 내공에 새삼 전율하게 만드는 특별함이 있다. 다음 달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르는 스릴러 연극 ‘미저리’가 그것이다.
스티븐 킹 소설을 각색한 연극은 소설 ‘미저리’의 열성팬인 애니가 작가 폴을 집에 가둔 채 집착하는 모습을 담는다. 캐시 베이츠 주연의 동명 영화(1990)로 더 유명해졌는데, 그때부터 애니는 광적인 스토커의 상징이 됐다. 길해연이 맡은 배역이 바로 애니 윌크스다.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MBC·2009) 등을 연출한 스타 PD 황인뢰 연출가가 처음 대본을 건넸을 때 길해연은 두려움이 앞섰다고 한다. 잘 알려진 캐릭터인 만큼 부담이 컸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길해연은 “황 감독님이 제 연기에서 감정의 섬세한 흔들림을 봤다고 하시더라. 새로운 애니를 원한다는 말씀에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초연 때 “소설, 영화, 연극을 통틀어 가장 완성된 애니”라는 찬사를 받으며 황 감독의 기대에 화답했다. 애니 역을 함께 맡은 김성령과 폴 역 김상중, 안재욱 등 걸출한 배우 4명이 번갈아 호흡을 맞추는데, 길해연의 애니는 섬뜩하면서도 애처롭다. 100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몰입감도 여기서 온다.
“애니의 삶을 죽 그려봤어요. 엄격한 청교도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그른 강박이 자리 잡고, 그게 집착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사회에서 고립된 그에게 유일한 안식이 미저리였던 거죠. 오래도록 살피니 애니가 보이더라고요.”
그가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지금껏 10여권의 동화를 쓰기도 한 작가인 그는 문학소녀 시절 우연히 본 연극에 매료됐다. 희곡을 쓰고 싶어 국문과에 갔고 1986년 극단 작은신화의 창단 멤버로 연기의 길에 들어섰다.
길해연은 안판석 감독이 신뢰하는 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 ‘아내의 자격’(JTBC·2012)으로 인연을 맺은 이후 ‘봄밤’(M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JTBC·2018) 등 매 작품 함께해 오고 있다.
“안 감독님은 자연스러운 걸 정말 좋아하세요. 아내의 자격 때 식당에서 일하시는 연변 분들을 찾아갔었어요. 억양보단 캐릭터의 전반적인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썼죠. 그런 점을 리얼하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길해연은 드라마 ‘날 녹여주오’(tvN)와 영화 촬영도 병행 중이다. 그런 쉼 없는 열정은 어디서 올까. 그는 “다채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연기자의 큰 축복”이라고 했다.
“여러 인물의 고난을 겪다 보면, 되레 힘이 날 때가 있어요. 캄캄한 동굴 같은 순간도 언젠가 끝나고 새로운 막이 펼쳐질 거라는 의연한 마음을 연기에서 배워요. 참 감사하죠.”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