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집이 장사가 안 된다. 일제 불매 운동의 유탄을 맞았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한국산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인데 일본 음식이라서 꺼린다는 것은 이 운동의 취지에서 벗어난다. 일식집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말이 논리적으로는 맞으나 감성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어린 시절에 먹은 음식을 맛있다고 여긴다. 이건 본능이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의 음식에 대해 애착을 가진다. 이 애착은 국가나 민족 단위로 확장한다.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 음식이, 한국인은 한국 음식이 최고이다. 애향심이나 애국심이라 생각하면 된다. 여기까지이면 괜찮다. 이 애향심과 애국심이 과도하여 자기 국가나 민족의 음식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발생한다. 음식국가주의 혹은 음식민족주의이다.
한국인은 당연히 한국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한국 음식을 맛없다고 하면 애국심을 의심한다. 한국 음식의 순수성이 훼손당하지 않게 보호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외국 음식을 먹으면 애국심이 옅어질 것이라는 걱정을 한다. 드디어는, 미국 음식을 좋아하면 친미 성향이고, 일본 음식을 즐겨 먹으면 친일적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한국인의 음식국가주의 혹은 음식민족주의는 일본 음식에 대해 특히 강력하게 작동을 한다. 일본 식민지 경험 때문이다. 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강요한 희생과 고통을 떠올리면, 지금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을 대하면 “일본 것이면 다 싫어” 하는 감정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적 관점만으로 일본 음식을 대할 수는 없다. 음식은 문화이고, 문화적 관점으로도 일본 음식을 봐야 한다.
외래 문물과의 마찰은 모든 문명권의 숙명이다. 우선은, 일본 음식과의 숙명적 마찰을 한국 음식문화의 자양분으로 삼는 문화적 자신감이 필요하다. 자세히 관찰을 하면 일본 음식이라 하여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다. 한국 음식문화는 일본 음식에 대해 상당한 포용력과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 일식집’은 대부분 한국화한 ‘일본식 음식’을 낸다. 고추냉이와 간장 옆에는 막장과 초고추장이 놓인다. 상추 깻잎에 생마늘 풋고추도 있다. 생선회를 쌈으로 먹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음식 관습이다. 매운탕과 밥으로 마무리를 하면서 김치 젓갈 장아찌 등이 안 나오면 섭섭하다. 요즘은 일본에서 먹지 않는 ‘전통의 보리굴비’가 일식집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사시미집’이 완전히 한국화한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일식집인 이자카야나 라멘집, 돈까스집 들도 한국인의 기호와 관습에 맞추어 음식을 바꾸고 있다. 김치 장아찌 초고추장 등이 예사로이 놓이고 국물 음식은 칼칼해졌다. 특히 양이 풍성하다. 이런 변화는 모든 문명권에서 똑같이 일어난다. 한국 음식이 외국에 나가도 그들의 기호와 관습에 맞추어 변한다. 음식이 국경을 넘어가면 ‘국적 유지’를 요구할 수 없다. 모든 문화가 그렇게 월경을 하고 또 변주를 한다. 이를 문화의 한 특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방탄소년단의 케이 팝에 굳이 ‘서구 팝의 문화 국적’을 붙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일상 음식 중에도 일본 유래 음식이 많다. 김밥은 후토마키의 변형이다. 1924년에 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스시’ 조리법으로 실려 있는 게 처음이다. 일본에서 유래하였음에도 한국 김밥은 더 이상 일본 음식이 아니다. 일본에는 없는 수십수백 종의 김밥이 전문점에서 팔린다. 인스턴트 라면과 단무지도 일본에서 온 것이다. 한국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 단무지와 함께 먹으면서 일본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빙수도 일본에서 온 것이나 한국화하였고, 많은 아시아인이 한국 브랜드의 한국식 빙수를 즐긴다. 일본 음식의 한국화 사례는 꼽자면 한이 없다. 더불어 한국 음식의 일본화 사례도 꼽자면 한이 없다.
문화의 융성은 포용력과 융통성에서 온다. 외래 문물에 대한 옹졸하고 편협한 태도는 문화를 죽일 뿐이다. 문화 영역에서 일본을 앞서자면 일본 문물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일을 거부하면 안 된다. 일식집을 피할 것이 아니라, 가서 즐겨야 한다. 물론, 일제 술은 마시지 말아야 한다.
황교익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