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 Barack, Run(출마해요, 버락, 출마해요).’
2006년 10월 뉴욕타임스의 보수 성향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도발적인 칼럼을 썼다. 민주당 연방상원의원 버락 오바마를 향해 대선 출마를 종용한 것이다. 9·11테러의 충격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슬람 추종자로 공격받던, 흑인 민주당 정치인에게 출마를 권유하는 보수 칼럼니스트라니.
몇몇 연설과 특이한 이력 등으로 오바마의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당시 민주당에는 힐러리 클린턴 등 유력한 후보들이 있었다. 브룩스는 “내 관점에서 보면 오바마의 상당수 정책과 개념에 동의하지 않고, 아마도 결국 그의 적들(공화당 후보들)에게 더 많이 동의하게 될 것”이라면서도 “오바마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브룩스는 “(이번 대선이) 오바마가 갖고 있는 재능과 자질(gift)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시기”라고 덧붙였다.
오래전 칼럼을 다시 떠올린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린 선거전략 전문가 스티븐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때문이다. 배넌은 최근 TV프로그램에 나와 (난립한 20여명의 민주당 후보 중) 트럼프 대통령과 1대 1로 맞설 만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배넌은 민주당이 트럼프 대통령을 꺾으려면 ‘잠룡’ 중에서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고, 그가 가장 주목한 인물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였다. 뒤늦게 경선에 뛰어들어도 내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후보가 될 수 있고, 대선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현 민주당 주자 중 트럼프 대통령을 꺾을 만한 후보가 없고 그를 꺾을 가장 유력한 후보가 미셸 여사라는 전망에 동의한다. 지금 여론조사에선 민주당 후보들이 앞서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겐 소위 ‘숨은 표’가 많다. 선거판이 본격화되면 현직 대통령의 힘은 더 크게 작용할 것이고, 경제지표도 그에게 유리하다. 선거 막판 극대화될 그의 장점을 누르려면 스토리 있는 후보가 필요하다.
미셸 여사는 자서전 ‘비커밍(Becoming)’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짝 보여줬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살아온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성장한 시카고의 흑인 노동자 가정은 예전 우리네 대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돈의 팔촌까지 어울리는 북적북적함 속에서 명문대를 나와 로펌 변호사로 성장하는 과정은 부모가 기대하는 자녀의 모습이었다. 일과 엄마의 역할에 모두 소홀히 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전 세계 직장여성의 현실이었다. 이웃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며 직장을 옮긴 뒤 약자를 대변해온 활동은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정치인의 태도였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한 여성이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일찌감치 정치를 꿈꿨던 그의 남편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그의 모든 판단이 정확할 것이라고,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서 다른 정치인보다 더 우호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믿는 건 그가 무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는 가난해서, 여성이라서, 유색인종이라서 아팠던 경험과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던 노력이 녹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 세입자들을 찾아다니며 임대료를 받아낼 때 몇 센트의 소중함을 느꼈다는 경험을 내세우는 정치인,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을’의 위치에 있는 동맹국들의 두려움은 무시하고 돈을 긁어내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보다는 나을 것이라 기대한다. 미셸 여사는 최소한 자서전에서 “미국이 가까운 우방들과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분통이 터졌다”고 했다.
그저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각국 외교관들이 내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각국 외교관들은 트럼프의 재선을 대비하는 바쁜 와중에 어쩌면 속으로는 기자처럼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출마해요, 미셸, 출마해요(Run, Michelle, Run).”
정승훈 국제부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