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는 제국대학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7개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조선인 유학생은 784명이다. 조선 청년들 중 최고의 두뇌들이다. 정종현의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은 이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지사의 삶을 살다가 스러져갔지만, 더 많은 청년들은 출세를 택했다.
일제강점기는 두 시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3·1운동의 여파로 1920년대 말까지는 저항이 컸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기가 팍 꺾인다. 일본제국을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으로 인식하면서 패배주의의 늪에 빠져든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지식인들 스스로 ‘제국 신민’을 자처하면서 일본인의 시선을 내면화한다. 자발적인 내선일체의 경지다. 식민지 청년들은 ‘제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환각에 빠진다. 그들은 만주의 항일독립군을 홍비(紅匪)로 부르며 제국을 어지럽히는 야만세력으로 간주한다. 박정희, 백선엽 등은 이 시기 홍비 ‘토벌’에 나선 인물들이다.
김교신(1901~1945)은 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한국의 서울대 사범대에 해당) 지리박물과를 졸업하고 양정고보에서 10년간 재직한 후, 40년 9월 경기중학교(현 경기고) 교사로 복귀한다.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곳이다. 교단에 복귀했지만 반년 만에 사임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 동화정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38년 3월부터 제3차 교육령에 의해 모든 교육 내용에서 일본적인 것을 강화하고 수업을 일본어로 할 것을 강요하여 철저한 황국신민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긍지를 잃지 않았던 김교신은 조선말로 수업을 진행했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 중에 조선말 수업에 반발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김교신은 확고한 태도로 동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생과 대치했다. 수업 중 왜 국어(일본어)를 쓰지 않느냐고 반발하는 학생에 맞서는 교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결국 김교신은 한 학기 만에 학교를 떠난다.
교사에게 덤빈 학생의 내면을 상상해보자. 그들 또한 충성스러운 ‘황국 신민’을 자처하며 일본인의 시선을 내면화했을 것이다. 뛰어난 수재들이었으니 광복 후 이 나라의 정책을 좌우하는 엘리트로 자랐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의 많은 부분을 그 아류들이 좌지우지했다. 요즘 앞 다투어 아베 정권과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들이다.
지리학자이기도 한 김교신은 양정 시절인 34년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를 썼다. 어둠이 깊어가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다. 비겁한 자에게 안전한 곳이 없고 용감한 자에게 불안한 땅은 없다고. 조선 역사에 편안한 날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증명한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 없다. 이 반도가 위험하다 할진대 차라리 캄차카반도나 그린란드 빙하 속으로 가야 한다. 조선 반도에 지리적 결함, 선천적 결함은 없는 줄로 확신한다. 다만 문제는 거기 사는 백성의 소질과 담력이 중요할 뿐이다. 동양의 모든 고난이 이 땅에 모여 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모든 것을 용광로에 달이어 낸 농축액은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명문이다. 힘을 길러 침략전쟁 하자는 게 아니다. 진리 위에 나라를 세우자는 뜻이다. 고난으로 연단된 우리의 사상과 문화로 인류에 기여하자는 민족 이상이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백성의 소질과 담력’이 중요하다는 것. 마치 오늘의 우리에게 당부하는 말 같지 않은가. 아베 정권의 도발을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빌미가 될 반일감정은 자제해야 한다. 우리의 약점으로 드러난 기초과학 등 장기 과제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키워야 한다. 깨우침의 기회를 준 아베가 고마울 지경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