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출신 1호 변호사, “절박했던 17년, 이제 그들을 도울 것”

입력 2019-08-20 04:03
탈북민 출신 1호 변호사인 이영현씨가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신변 안전 문제로 얼굴 공개를 꺼렸다. 김지훈 기자

글 싣는 순서
<1부 :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2부 : 공동체 균열 부르는 ‘신계급’>
<3부 : 한국을 바꾸는 다문화가정 2세>
<4부 : 외국인 노동자 90만명 시대>
<5부 : 탈북민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법>

마지막 기회였다. 남측으로 건너온 지 17년, 이영현(36)씨는 변호사시험을 치른 뒤 지난 4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같은 고난을 겪은, 혹은 겪고 있을 사람들을 돕겠다며 시작한 꿈이었기에 이씨는 절박했다. 북에 두고 온 가족뿐만 아니라 여태 그를 도와준 많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변호사가 되어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입력한 그의 수험번호는 다행히 합격명단에 들어 있었다. 4전5기, 5번째 도전 만에 이룬 결과였다.

이씨는 ‘탈북민 출신 1호 변호사’다. 지난 2016년 탈북민 인구가 3만명을 넘어선 걸 생각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다. 한국에 건너와 전문직에 종사할 만큼 잘 자리잡은 탈북민이 그만큼 드물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씨의 행보는 다른 탈북민들에게도,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이 많다. 합격 뒤 현재 서울의 한 법무법인에서 시보 생활 중인 이씨를 18일 국민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만 14세가 되던 1997년 두만강을 건넜다. 이씨 가족의 부탁으로 외삼촌이 그를 데리고 강을 건너려던 것이었지만 살아남은 건 이씨 혼자였다. 그를 보살펴 준 건 미국에서 건너온 어느 한인 선교사였다. 거처를 소개해준 선교사는 이후 옌지에 학교를 세운 뒤 이씨를 데려왔다. 이곳에서 이씨는 다른 탈북민 아이들과 함께 중국 동포인 척 신분을 숨기고 학교에 다녔다.

한국 사회에 건너온 건 월드컵이 열린 2002년이었다. 그해 3월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으로 망명한 탈북민 중 그와 함께 지낸 아이가 섞여 있는 게 방송에 나오면서다. 더이상 신분을 숨길 수 없게 된 그는 5월 입국했다.

여느 탈북민들처럼 이씨 역시 한국 사회 정착이 쉽지 않았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목적도 계획도 없이 보낸 세월도 꽤나 길었다. 대학 시절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홀로 책더미를 이고 산에 들어갔다가 피부병에 걸려 하산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씨를 이끌어 준 건 중국에서부터 그를 도왔던 선교사다. 이씨를 부산의 대안학교에 입학시켜 준 것도, 탈북민 출신 첫 로스쿨생이 되기까지 힘을 실어준 것도 그다. 이씨에게는 부모님이나 진배없다.

이씨는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려면 제도적 지원뿐 아니라 그가 받아온 따뜻하고 인간적인 관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탈북민 모자 아사 사건처럼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탈북 자체가 목숨을 건 과정이기 때문에 남한 사회에 도착한 이들은 의지 자체가 소진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면서 “제도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삶의 의지를 다잡을 수 있도록 주변의 관심과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