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민세진] 임전무퇴라는 차선의 선택

입력 2019-08-20 03:59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미국 배우 제임스 딘이 불의의 사고로 죽기 직전 주연했던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 두 자동차가 절벽 끝으로 질주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질풍노도의 두 십대가 동네 또래집단의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훔친 차로 내기를 한다. 절벽 끝으로 달리다가 먼저 차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나중에 탈출한 사람이 승자가 되는 내기다. 경제학의 게임이론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원래 내기 이름을 따서 ‘치킨게임’이라 부르고 분석한다. 영어의 치킨은 겁쟁이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론을 통해서도 치킨게임이란 표현을 종종 접할 수 있다. 대립하는 두 주체가 끝까지 대결을 고집하면 둘 다 큰 피해를 보는 상황을 두고서다. 최악을 피하려면 누구든 먼저 대결을 회피해줘야 한다. 하지만 겁쟁이로 취급되는 것도 피해가 상당하기 때문에 쉽게 회피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지금 우리나라와 일본의 대립 양상은 치킨게임을 닮았다. 이렇게 질주하다가는 양국 다 피해가 커질 뿐이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라도 먼저 손을 내밀기에는 희생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을 만큼 판이 커져 버렸다. 사실 치킨게임을 건 쪽에서는 상대방이 대결에 응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절벽 위 자동차 질주를 하지 않고도 상대방을 겁쟁이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게 상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바람일 뿐이고 대결을 걸 때는 자동차 질주를 할 각오와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우리 정부가 징용배상 판결 이후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이런 각오와 대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런 궁금증은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들기는 한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들을 구상할 때 일본이 입을 피해 정도를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정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베 정부의 행보는 경제에 다소 손실이 있더라도 한국의 면을 깎아 일본 국민의 애국심을 부추겨 군대를 둘 수 있는 개헌을 추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비록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7월 21일 있었던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발의 의석수 확보는 실패했지만 개헌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20년이 넘는 경기 침체에서 간신히 벗어나는 조짐이 있는 일본으로선 경제적 손실을 마냥 방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치킨게임에 들어선 이상 우리 국민의 일제 불매운동이든 일본여행 자제든 일본 정부의 계산을 틀어지게 하는 모든 수단들이 중요하다. 일본에 입힐 수 있는 경제적 손실이 클수록 궁극적으로는 일본 정부와 협상을 해야 하는 우리 정부가 모양새 좋은 회피 방안을 내놓을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키워주기 위해 단결된 보이콧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정부나 정치인들이 이에 앞장서거나 부추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경제적 손실의 피해자는 민간이다. 이럴 때 명분과 표만 챙기는 것은 직무유기다. 합리적인 정부고 책임을 아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의 애국적 행동에 감사하고 잘 수습할 방도를 다각도로 찾아야 한다. 그중에는 좋든 싫든 과거 정권들이 다른 나라와 한 약속을 존중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어느 때 어느 나라에서든 정부가 외국과 한 약속이 국민 모두를 만족시킬 리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당시 정권의 능력으로서는 최선이었다는 인식은 공유될 필요가 있다. 잘못된 약속이더라도 그 짐을 우리가 짊어짐으로써 국제적 신뢰를 지켜내는 것이 국격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그러한 신뢰 관계에 일본은 예외라면 최소한 미국 등 다른 나라와의 신뢰 관계를 더 공고히 해서 내 편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영화에서 치킨게임은 한 인물이 차 손잡이에 옷의 끈이 끼어 차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바람에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많은 국민이 임전무퇴라는 차선의 선택을 한 지금, 정부는 옷자락이 차에 끼지 않도록 언제라도 뛰어내릴 수 있도록 더 냉정해져야 한다. 이 문제를 오래 끌기에는 시절이 너무 위태롭지 않은가.

민세진(동국대 교수·경제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