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79)의 책은 올해 상반기에만 국내에 3권이 출간됐다. ‘세월’ ‘진정한 장소’(이상 1984BOOKS) ‘부끄러움’(비채)이다. ‘세월’은 지난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랐다. 최근 출간된 ‘진정한 장소’는 인터뷰집이다. ‘부끄러움’은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독자적인 글쓰기가 잘 나타난 작품이다.
‘세월’은 1941년에서 2006년까지의 세월을 한 여성의 시선으로 보면서 개인의 기억에 공동의 역사를 투영한다. 그는 9일 국민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우리 사회가 녹아 있고, 사회가 모든 사람의 합이기도 하다는 것은 내게 자명한 이치”라면서 “‘세월’은 역사를 관통한 한 여성의 삶이 아니라 여성을 관통한 역사를 말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세월’은 1인칭 시점인 ‘나’가 아닌 ‘그녀’ ‘우리’ ‘사람들’을 주어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한다. 전통적인 자서전의 형식이 아니다. 작가가 우리 내면을 항상 그리고 이미 사회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세월’을 “높이도 소재도 다르게 이어 붙여진 역사의 직조물”로 느낀다. 에르노는 이런 작업 방식에 대해 “내 글이 어떤 메시지나 의미를 전달하는지 나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에르노는 ‘세월’이 맨부커상 후보작이 된 것과 관련 “처음에는 놀랐고 그다음에는 기뻤다. 그러나 이내 나는 작가들을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자리에 올려놓고 수상자를 선발하는 방식의 상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르노도상을 받은 ‘남자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모든 상은 작품 전체에 수여된 상이었다. 나는 그런 방식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1974년 ‘빈 장롱’으로 등단한 그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남자의 자리’ 등을 썼고 마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램 독자상을 수상했다. 권위 있는 프랑스 출판사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된 최초의 생존 작가이기도 하다. 프랑스 릴본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루앙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진정한 장소’는 작가가 자기 삶과 글쓰기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에르노는 이 책에서 “내게 진정한 장소는 글쓰기”라고 말한다. 부연 설명을 요청하자 “나는 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통해 교양 있는 이질적 세계로 옮겨왔다. 내가 자란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내가 들어온 이 세계에 온전히 속한 것도 아니다. 내가 어느 세계에도 소속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쓸 때만 진정한 내 자리에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긴 세월, 글쓰기를 자신의 유일한 처소로 여긴 작가의 명징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답변이었다. ‘부끄러움’을 비롯한 대다수 작품은 작가의 성장기,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결혼 등을 가공이나 은유 없이 담고 있다. 이런 작품 경향에는 강인하고 직설적이었던 어머니의 영향도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하층민이었지만 다독가였고, 내가 독서를 좋아하도록 애쓰셨다. 장사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길 즐겼다. 22살에 어머니에게 ‘소설을 썼다’고 했을 때 행복해하시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땐 애증의 감정이 컸지만 돌아가신 지금은 힘과 자유, 긍지와 같은 유산을 모두 헤아리고 있다”고 했다.
그의 작품에는 주체적 자아의식을 가진 여성이 화자로 등장한다. 젊은 시절 체험한 ‘68혁명’의 영향도 있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로 출발한 이 혁명은 당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베트남전 반대 등 광범위한 사회 운동으로 확산됐다. 에르노는 2017년 10월 미국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성추문 폭로로 시작된 미투 운동에 대한 기대가 컸다.
에르노는 “미투 운동은 놀라운 각성이다. 아직 혁명은 아니지만 분명한 혁명의 시작”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미투 운동은 인터넷, 페이스북, 트위터를 통해 이뤄지는 전 세계적인 운동이다. 남성적 헤게모니를 끊고, 남성들이 폭력적인 상황이나 혹은 부부 관계의 불평등을 여성들이 참도록 여성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을 종식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