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수의 한국 공연과 TV 출연이 금지됐던 시절인 1986년, TV로 중계된 서울국제가요제에 참가한 일본 걸그룹이 있었다. 이름은 ‘소녀대’. 우리나라 여성 그룹이라면 ‘○○자매’ ‘△△시스터즈’가 전부이던 때니, 예쁘장한 10대 소녀 셋이 발랄하게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충격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87년 이들을 카피한 ‘세또래’가 탄생했고, 10년의 간격을 두고 S.E.S와 소녀시대가 차례로 데뷔했다. ‘소녀시대’ 팀명은 이승철의 같은 제목의 노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소녀대의 기억을 떠올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데뷔한 일본의 보이그룹 ‘탄도소년단(BALLISTIK BOYZ)’의 연관 검색어는 ‘방탄 짝퉁’이다. 줄이면 ‘BTZ’가 되는 영어 이름이나 7인조 멤버 구성, 음악 스타일 등이 대놓고 방탄소년단(BTS)을 복제했다고 입길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이들이 지난 5월 오리콘 앨범차트 정상에 올랐으니, 짝퉁이라는 세평이 일본에서는 큰 흠이 아니었나 보다.
소녀대와 탄도소년단은 30여년 새 뒤바뀐 한국과 일본 대중음악의 위상을 보여주는 예다. 미국과 일본, 특히 일본 아이돌의 제작 시스템을 모방하며 성장한 K팝 아이돌을 일본이 거꾸로 벤치마킹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지난해 방송된 엠넷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48’에 참가한 일본 걸그룹 HKT48 멤버 미야와키 사쿠라는 “한국 분들은 일본에서도 인정받는데, 일본 아이돌은 일본을 벗어나는 순간 인정받지 못해 분하다”며 “한국 걸그룹처럼 최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일본 내에서 꽤 인지도를 쌓은 현역 아이돌의 말이라 인상 깊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른 곡(1963년 사카모토 큐의 ‘스키야키’)을 가지고 있는 J팝의 기세가 사그라든 걸까.
아이돌 전문 웹진 ‘아이돌로지’ 편집장인 대중음악평론가 문용민(필명 미묘)씨는 “J팝의 몰락이 아니라 K팝의 도약”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세계 대중음악 시장은 언제나 철저히 미국과 영국 중심이었고, J팝의 성취 역시 세계시장에 진출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었다”며 “K팝이 예외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 탄도소년단의 경우도 “K팝이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라며 “아시아권 여러 나라에서 곡을 그대로 베끼거나 스타일링을 흡사하게 하는 K팝 모방 그룹이 등장한 건 이미 5~6년 전”이라고 했다.
이게 웬 ‘국뽕’이냐며 고개를 저을 독자도 있겠다. 빌보드의 ‘소셜 50’ 차트를 한번 보자. 빌보드의 주요 차트는 아니지만 가수들의 SNS 팔로어와 언급 빈도, 조회수 등을 종합해 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세계 10, 20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3일자 차트 톱10에는 1~4위를 차지한 BTS, 엑소, NCT 드림, 블랙핑크 등을 비롯해 한국 아이돌 6개팀이 자리 잡고 있다. 50위 안에 미국 가수가 17명인데, 홍콩 국적이지만 GOT7 멤버인 잭슨을 포함하면 K팝 가수 역시 17개팀이 올라 있다. 세계 음악팬들 사이에서 K팝이 얼마나 주목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곳곳에서 반일(反日)과 극일(克日)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1998년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 계획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엑스 재팬’ ‘안전지대’ ‘글레이’ 같은 팀들이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때문에 일본의 문화 식민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 언론이 ‘K팝은 왜 세계를 석권하는가’ ‘K팝 3대 기획사 시가 총액이 일본의 Avex와 아뮤즈를 넘어선 이유’ 같은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포브스 재팬, 슈칸겐다이). 후발주자였던 K팝의 대역전이다. 버닝썬 사건 등이 터지면서 K팝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대중음악만큼 극일을 이룬 문화예술은 아직 없는 듯하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