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통상전쟁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비유가 어울릴 정도로 극한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법정에서 승패를 가를 수밖에 없을 지경이라는 분석도 과언이 아니다. 두 나라는 후쿠시마산 수산물 분쟁에 이어 다시 WTO에서 제소국과 피소국으로 나란히 앉게 될 전망이다.
WTO 제소로 넘어가면 통상 1년에서 1년3개월이라는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다만 한국 입장에서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1995년 1월 WTO가 출범한 이후로 한국이 연관된 국제 통상분쟁 사례를 살펴보면 한국의 승소율은 50%에 이른다. 일본과의 분쟁에서 세 차례나 승소한 경험도 있다. 이에 WTO 제소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하지만 변수는 있다. WTO의 분쟁해결 절차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한·일의 다툼은 1심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항소심까지 봐야 한다. 그런데 항소심을 담당할 분쟁해결기구(DSB)가 오는 12월이면 사실상 ‘셧다운’에 돌입한다. 꼬일 것이 예고된 실타래를 풀어내려면 한국 정부 차원에서 미국을 움직일 ‘묘수’가 필요하다.
1년에서 1년3개월
WTO 설립 취지는 ‘무역 자유화를 통한 전 세계적 경제 발전’으로 요약된다. 국가 사이 자유로운 무역을 지원하는 기능이 핵심이다. 그 수단 중 하나로 마련된 게 분쟁해결 절차다. 무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봉합하는 장치가 없다면 교역 확대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9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5일 기준으로 586건의 무역·통상 분쟁이 WTO를 통해 해소됐다.
무역분쟁 자체가 민감한 사안인 만큼 분쟁해결 과정은 복잡하다. 우선 제소국 협의 요청에서부터 분쟁해결 과정이 시작된다. 피소국과 협의해 풀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는 제도적 장치다. 60일이라는 시간을 두고 당사국 협의를 진행한다. 한국과 일본 사례처럼 서로 고위급 협의조차 성사되지 않는다면 이 단계에서는 한자리에 앉을 수 있다.
60일 안에 해결을 보지 못하면 키는 제3자에게 넘어간다. 제소국은 WTO 분쟁해결기구에 국제 통상법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패널 설치를 요청하게 된다. WTO 분쟁해결기구는 1개월여 동안 패널을 구성하고 활동에 들어간다. 패널은 긴급 사안의 경우 최대 3개월, 일반 사안은 최대 6개월까지 검토해 보고서를 만든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내용이 담긴다.
패널 보고서에 승복하지 않는다면 상소도 가능하다. 당사국은 상소한 날부터 60~90일 이내에 상소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다. 자국 입장을 설명하는 셈이다. 7명의 분쟁해결기구 위원들은 패널 보고서와 상소 보고서를 놓고 최종 판정을 내린다. 이때 내린 결정엔 더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 단계까지 1년에서 1년3개월이 걸린다.
승소율 50%
시간이 걸리더라도 WTO 분쟁해결 절차를 거치는 이유는 결과가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경우 잘 이행하지 않기는 하지만, 대부분 분쟁해결기구 결정에 승복하고 잘 이행한다”며 “다만 가시적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2년 이상 걸린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적극적으로 WTO 분쟁해결 절차를 활용하는 국가 가운데 하나다. 국민일보가 WTO와 산업부를 통해 확인한 결과, 현재까지 한국이 제소·피소국이었던 분쟁 건수는 38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8건은 첫 단계인 양자 협의에서 타협점을 찾고 마무리됐다. 1심과 상소심까지 올라간 30건 중 한국의 승소로 기록된 사례는 15건이다. 승소율이 50%나 되는 셈이다. WTO 분쟁해결 절차를 거쳐 분쟁의 씨앗이 된 조치가 철폐되거나 조정된 경우를 승소로 봤을 경우다.
일본과의 분쟁에서 승소한 사례도 2건 있다. 공교롭게도 1건은 반도체 관련이었다. 일본 정부가 SK하이닉스에 부과한 상계관세를 철폐한 사건이다. 일본은 2006년 1월 SK하이닉스 D램에 27.2%의 상계관세를 부과했다가 2009년 4월 WTO의 최종 결과가 나온 뒤 관세를 철폐했다. 최근에는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출을 둘러싼 분쟁에서 한국의 역전승으로 결말이 나기도 했다. 공식적 ‘승소’ 기록으로 남지 않았지만 김 수입량을 두고 WTO에서 일본과 맞붙은 분쟁에서도 한국은 승리했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시 분쟁해결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이 수입 쿼터를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마무리했다”고 전했다.
분쟁해결기구 위원이라는 변수
한국이 WTO 분쟁해결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지만, 근본적 걸림돌이 등장하고 있다. 상소심을 다뤄야 할 본쟁해결기구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WTO 분쟁해결기구 위원은 모두 7명이다. 현재 네 자리가 공석이다. 3명이 남아 있지만 2명은 오는 12월 10일 임기가 끝난다. 최소한 3명 이상은 돼야 상소심을 심의할 수 있어 신임 위원을 뽑지 못하면 기능을 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한국이 올해 안에 일본을 제소한다고 해도 상소심으로 갔을 때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해진다.
위원 선임이 난항에 빠진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 WTO 체제에 불만을 품은 미국은 신임 위원 선임을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선임할 경우 WTO를 탈퇴하겠다는 식의 강수도 두는 상황이다. WTO 입장에선 미국 눈치를 보다 보니 위원 선임을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외교 역량이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국을 움직여야 한국과 일본의 WTO 분쟁해결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이 입장을 선회하도록 여러 나라가 노력하고 있다. WTO 분쟁해결 절차가 파탄에 이를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서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 WTO 개혁 차원에서 전향적으로 입장을 변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신준섭 이종선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