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인종주의 비난해야… 총기 규제” 외쳤지만 되레 역풍

입력 2019-08-07 04:02
한 활동가가 6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엘패소 총기참사’ 항의집회에서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KK)’을 상징하는 흰 고깔 마스크에 미국 성조기 문양의 옷을 입은 채 장난감 총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얼굴 모형을 겨누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에서는 지난 3일 한 백인 남성이 범인인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멕시코인 8명을 포함, 총 22명이 숨지고 24명이 다쳤다. 로이터연합뉴스

총기규제에 소극적이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총기규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 주말 텍사스주와 오하이오주에서 연이어 발생한 대규모 총기참사로 ‘트럼프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텍사스 총기참사는 히스패닉을 겨냥한 증오범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온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책임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성명에서 총기참사를 정신질환자의 일탈이나 언론·소셜미디어 등의 탓으로 돌려 비판을 자초했다. 그동안 자신의 인종차별적 발언 및 ‘편가르기’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인들은 한목소리로 인종주의와 편견, 백인우월주의를 비난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미 언론이 보도했다. 그는 “미국에 증오가 발붙일 곳은 없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책으로 ‘적기법(red flag laws)’ 통과를 촉구했다. 위험인물의 총기류 소지를 선별적으로 규제하자는 것이다. 그는 “공공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것으로 판단되는 이들이 총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총기규제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지만 오히려 거센 비판이 잇따랐다. 특히 성명 내용 중 “방아쇠를 당기게 한 건 총기가 아니라 정신질환과 증오”라는 발언이 도마에 오르면서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강력한 신원조회가 이날 (트럼프 대통령) 메시지의 핵심은 아니었다”며 “미국총기협회(NRA)와 싸우기를 분명히 주저한다”고 지적했다. 각종 로비로 총기규제를 막아온 NRA는 성명 후 “총기 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총기참사의 원인이 정신질환자의 일탈이라는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민주당 소속 코리 부커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대통령은 잘못됐다”며 “백인우월주의는 정신질환이 아니며 총기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증오를 실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도 “진실을 피하기 위한 대통령의 꼼수”라고 비판했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인종차별 발언에 대해서는 눈감았다는 지적도 있다. 세스 물턴(매사추세츠) 하원의원은 “공화당과 자신의 인종차별주의적 레토릭(수사)은 탓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본인이 분열적 정치를 하는 데 그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총기난사 참극을 반이민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는 점도 지탄의 대상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트위터에 총기 구매자 신원조회 법안과 이민개혁 법안을 연계하자고 제안했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난사 사건을 이민정책에 대한 의회의 양보를 얻어낼 기회로 여겼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이민이 문제가 아니라 백인우월주의, 총기 안전 입법에 대한 미국의 무대책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총기사고 대책을 위해 초당적 협력을 주문하면서 미 의회가 총기규제법 마련에 나설지 주목된다. 미 의회는 여름 휴회를 접고 개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미 의회전문매체 더힐 등이 보도했다. 총기규제에 소극적이던 공화당이 이전보다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은 관련법 통과가 어렵다는 시각이 여전하다고 전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