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우아하고도 절도 있는 움직임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하나의 시퀀스를 마칠 때마다 감탄에 겨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백조의 호수’ 속 오데트로 분한 발레리나 이리나 콜레스니코바(39)의 존재감이란 그토록 강렬했다.
러시아의 대표 클래식 발레단 중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Saint Petersburg Ballet Theatre·SPBT)가 첫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다. 수석 무용수인 이리나를 필두로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 격인 ‘백조의 호수’를 선보인다. 국내 발레 팬들로서는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에 앞서 대만에서 진행 중인 공연을 미리 맛봤다.
지난 3일 찾은 대만 국립극장은 공연 시간 한참 전부터 복작였다. 현지 관객들의 관심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공연장은 동양적 느낌을 물씬 풍기는 외관부터 인상적이었는데, 내부는 훨씬 더 웅장했다. 4층 1200석 규모의 대형 공연장이 사이드석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메워졌다. 웅성거리던 소음은 암전이 되자 삽시간에 사라졌다.
막이 오르고, 서정적 선율이 고요를 깼다. 무용수들의 사뿐한 움직임은 점점 템포를 더해갔다. 따로 또 같이, 독무와 군무를 반복하며 서서히 관객들을 극 안으로 안내했다. 광대가 재기발랄한 움직임으로 흥을 돋우는 궁정 무도회 장면이 초반 시선을 붙드는데, 신비로운 호숫가로 배경이 전환되면서 이 공연 고유의 매력이 배어나기 시작한다.
차이콥스키의 고혹적 음악이 어우러진 ‘백조의 호수’는 1877년 러시아 초연 이후 수많은 버전으로 재해석됐는데, SPBT는 마린스키 발레단의 콘스탄틴 세르게예프가 재안무한 버전을 선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해피엔딩이다. 지그프리드 왕자가 악마 로드바르트의 날개를 찢어 물리치고 오데트 공주에게 걸린 저주를 푼 뒤 그와 사랑을 이룬다.
발레리나가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 1인 2역을 소화하는 것만은 모든 공연에서 공통적이다. 백조들의 군무에 이어 등장하는 이리나가 매 순간 좌중을 압도한다. 완벽한 동작들을 유려하게 이어가는 고난도 연기로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30년 발레 경력 중 무려 25년간을 ‘백조의 호수’ 무대에 서 온 그의 내공이 빛을 발한다.
앙상블과의 기량 차이는 작품 전체의 균형적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무용수들 간 호흡과 움직임이 어긋나는 순간이 잦아 몰입을 해치곤 한다. 일사불란한 군무에 익숙한 국내 관객들에게는 다소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럴수록 이리나의 출중함은 더욱 돋보이는데, 그의 황홀한 몸짓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140분(인터미션 포함)이 짧게 느껴진다.
내한 공연은 오는 28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발레 입문자들에게는 특히나 놓치기 아까운 기회다. 수준급 해외 발레단의 공연으로는 비교적 낮은 가격(최고가인 VIP석이 12만원)으로 책정돼, 발레의 대중화에도 얼마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만 공연 이후 만난 이리나는 “한국 관객들이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어 “함께 공연했던 마린스키 발레단의 김기민이 ‘한국인들은 워낙 발레를 좋아하고 무엇보다 진실한 관객들이기 때문에 공연에 만족한다면 분명 뜨거운 호응을 보내줄 것’이라고 안심시켜줬다. 그러길 바란다”며 미소를 지었다.
타이베이=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