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기적… 아직도 내 목회 주제는 ‘울어라 열풍아’

입력 2019-08-05 22:14
일러스트=박재준

감사(感謝). 너무 익숙한 말이 감사이다. 사탄은 감사를 싫어한다. 감사는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탄은 신앙의 두 축이요, 신앙의 꼭지점인 겸손과 감사를 매우 싫어한다. 겸손한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이다. 신앙의 금자리이다. 감사는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길 수 있은 축복의 자리이다. 그러나, 이론은 맞지만 감사하기가 만만치 않은 삶속에서 말처럼 쉽지 않다.

살다보면 제일 잃어버리기 쉬운 고백이 감사이다. 처음 사랑, 첫 사랑 때에는 그저 감사,감사 고백하지만 참으로 입술에 발린 고백으로 그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목사로서 제일 어려운 것이 감사이다.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 뿐인데도 말이다. 우겨쌈을 당해도, 에워쌈을 당해도, 가난해도, 병들어도, 망해도, 예수그리스도 안에 감사는 염려와 근심을 추방하는 강력한 권세요, 은혜이다.

이곳에서 목회하며 24년! 불가항력적 은혜로 시작된 이 부르심에 초심을 잃지 않으려 남은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 이 또한 감사이다. 대형교회이든 소형교회이든, 큰 교회는 큰돈이 없고 작은 교회는 작은 돈이 없다. 구호처럼 외치며 없는 것에 가난한 것에 막힌 것에 두려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감사가 없어지면 두렵다. 두려우면 염려가 우리의 목줄을 잡아당기어 기도의 부르짖음을 가로막아 버린다. 하늘 문을 닫아 버린다.

이곳은 허허벌판보다도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아 난 늘 허허허벌판이란 표현을 쓴다. 머슴의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다. 의인의 노래이다. 광풍 속에 파선한 죄 많은 내 인생은 빚진 것이 너무 많은지라 이 땅에 가장 큰 감사는 용서의 받은 감사이다. 용서받은 만큼 복음에 ‘빚진 자’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감사한다.

몇 년 전 탕자였던 첫째아들이 돌탕(돌아온 탕자)이 되어 돌아왔다.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 내 상처와 아픔 때문에 집나간 아들이 23년 만에 돌아왔다. 돌탕 큰아들! 회복하고 4년 함께 살다 이 땅을 훌쩍 떠났다. 아버지 보다 먼저 떠난 아들을 보면서 내가 죽인(?) 아들이지만 감사하기도 했다. 두 명의 아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말이다. 마치 벌판에서 아무 것도 없는 빈들일 때 300데나리온의 값을 먼저 계산한 것처럼, 감사를 잃어버리고 허둥대다가 멍하니 하늘보고 그래도 감사하기로 하였을 때, 주님이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오병이어입니다.’ 그 오병이어가 두 아들인 것이다. 한 아들은 하늘나라로 먼저 가고 두 아들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이 감사였다. 큰 아들 장례예배 중 한 자매가 부른 안타까운 찬양은 시편 118편 17절이었다. 그 감사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하신 일을 선포하리이다’ 찬양을 부른 그 자매가 둘째 아들의 아내, 내 며느리가 될 줄이야… 그리고 두 아들 모두 소명을 받고 둘째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부목사로, 막내아들은 신학을 하고 있는 가운데 태국에서 선교사역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고, 그래도 감사하였더니 손자 아별(오벳에돔-俄別以東에서 따온 이름)이를 선물로 주시고, 둘째 손자 아셀(亞說)까지 갑절의 선물을 주셨다. 허허허벌판은 외로운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잘 들리고, 감사의 기적들을 훨씬 더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 광야가 아름답다. 그래서 오늘도 감사한다.

감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겸손은 스스로 겸비해서 기적을 낳게 한다. 국가적 환란의 바람으로 불어 닥친 IMF의 위력도 모르고, 허허벌판에서 쓰러져 누운 벼이삭이 죽어가는 영혼들로 보여 세운 10평의 새하얀 천막은 하늘 문을 여는 루스땅 벧엘이 되었다. 티 없이 맑은 신앙의 고백은 목마름속의 감사생활이다. 그래! 감사하면서 한번 해보자! 하고 여기까지 왔다. 감사는 영적 윤활유요, 영적 에너지이다.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감사할 수 없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감사해보자. 메마른 곳에서… 광야에서… 그저 감사 그저 감사!

허허벌판에서 이삭 줍듯 주워들은 경남의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십계명’구절 하나 중심으로 감사하면서 한번 해보자!

첫째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고, 둘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고, 셋째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여, 넷째 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에서, 다섯째 앞 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한 대로. 여섯째,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 일곱째 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이곳, 여덟째 일산신도시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 변두리에서, 아홉째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장모님이 결사반대한 허허벌판에서, 열째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 해도….

그래서 고양시에 처음 와서 고양시의 신도시 개발 변두리 중 변두리 음지의 땅에서 감사하기로 하고 시작한 목회가 여기까지 왔다.

주님은 감사할 수 없는 조건을 주시어 ‘감사’의 기적을 낳게 해 주신다. 마치 춤추는 다윗처럼! 상황과 상관없이 그는 감사했다. 죽음의 위기 때도 아플 때도 넘어질 때도 에워쌈을 당할 때도 감사의 힘, 그 안에 위대한 인생을 하나님 안에서 끌어냈다. 감사는 파국을 막고 죄악을 막고 하늘을 뚫을 수 있는 매일의 기적을 낳는다. 이미 감사를 잊었다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벌판에서 견디고 이기고 살아갈 이유 하나를 찾는다면, 이곳에서 24년의 결론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감사이다. ‘나 같은 목사 놈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한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감사하지! 하나님의 둥지, 교회를 여덟 번을 새롭게 지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은혜요, 감사였다.

‘울어라 열풍아’ 가 내 목회의 주제가가 되어 울더라도 씨 뿌리는 감사, 기적을 낳는 눈물의 감사였다. 못 견디게 괴로워도, 양쪽 주머니가 텅텅 비어 있어도, 오늘 나 된 것은 감사의 두루마기를 입고 다윗처럼 춤추었던 기쁨으로의 감사 때문이다.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감사 속에 손 내밀어주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기 때문이다. 돈도, 길도, 물도, 사람마저 없었던 천지가 없는 것 뿐이던 이곳이 5천여세대 영혼의 텃밭이 되게 하신 것은 오직 감사의 열매이다. 없다는 핑계가 원망거리가 아니라 감사는 오늘도 기적을 낳는 다는 기쁨이다. 허허허벌판시절 새벽에 사람이 없어 시계를 보며 설교하면서도 감사할 수 있었음이 천지개벽, 상전벽해(桑田碧海)되는 기적을 낳았고, 그렇게 거둔 영혼들이 동역자가 되어 다음세대를 꿈꾸게 하는 리더들이 되었고, 오늘도 빈들의 기적은 계속되고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를 내려놓고 감사할 때에 감사보다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곱셈법칙을 알기에 감사로 살아간다. 온갖 풍요 속에 고통하는 때이지만, 슬픔 속에도 위로를, 가난 속에도 풍족함을 주시며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고 순수하게 해주는 것은 감사이다. 극한 환란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얻었다는 것보다, 잃은 것을 다시 찾아다니는 것보다, 온갖 생각하는 것까지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한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감사가 있기에 광야는 더욱 아름답다. 그래서 감사는 광야교회를 만든다. 죽음도 유익한 감사이다.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 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내가 살면 교회가 죽는다” 이 또한 감사이다.

감사의 기적이 있기에 오늘도 여전히 열정을 잃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김원수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일산주님의교회)

필자 약력

벽산그룹 20년 근무

서울장신대 졸업

장로회신학대 졸업

미국 코헨 목회학 박사(D.Min)과정 수료

Missionwide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