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잃은 지소미아” 파기 목소리 거세진다

입력 2019-08-05 04:02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지난 3일 열린 일본 정부 규탄 집회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682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역사왜곡·경제침략·평화위협 아베 규탄 시민행동’이 주최한 집회였다. 연합뉴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여권에서 한·일 관계가 파탄 직전에 와 있으니 민감한 군사정보를 공유하는 GSOMIA를 유지할 명분이 없어졌다는 주장이 거세진 상황이다. 일본이 갈등을 풀기 위한 대화에 계속 응하지 않거나 경제보복 조치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협정 파기와 이에 따른 한·일 군사협력 중단은 불가피해 보인다.

당초 우리 정부 입장은 GSOMIA 유지가 원칙이지만 상황 악화 때는 파기를 검토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지난 2일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안보상 수출심사 우대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면서 GSOMIA 파기가 유력하게 검토되기 시작했다.

화이트리스트는 군사 목적으로 전용될 우려가 있는 제품을 일본이 수출할 경우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나라들을 가리킨다. 일본이 한국을 군사 목적 전용 우려가 있는 국가로 봤기 때문에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이 내려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양국의 군사정보에 대한 보안 규정 등을 명시한 GSOMIA의 취지는 이미 퇴색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4일 “일본의 막대한 경제보복 조치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GSOMIA 유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판단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년 단위인 한·일 GSOMIA는 연장을 원치 않는 쪽이 협정 만기 90일 전(오는 24일)까지 서면으로 파기 의사를 통보하면 파기된다. 이때까지 아무런 입장을 전하지 않을 경우 협정은 내년 11월까지 자동 연장된다. 정부 일각에서는 협정 만기일 이후에 협정 파기를 선언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이 경우 미국의 중재를 최대한 끌어내고 이를 통해 일본의 보복 조치 철회를 압박하는 시간을 버는 효과가 있다. 협정 시한을 넘겨 파기를 선언할 경우 실질적인 파기 효력은 내년 11월 이후부터 발생하지만, 파기 선언 직후부터 한·일 간 군사정보 교환은 사실상 중단될 수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2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에서 “GSOMIA 문제는 한·미·일 안보협력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며 “우리로선 모든 것을 테이블에 올리고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강 장관은 이날 고위당정청협의회에서 “미국이 (GSOMIA 파기 시사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당시 회담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중재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앞으로) 중재하려 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여권 내에서 높아지는 파기 주장도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핵심 축으로 여기는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 틀마저 깨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높이겠다는 포석이다.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일본의 조치는 한·일 관계의 건강한 미래를 사실상 파기한 것이고 (한국이) 우호 국가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어서 외교안보 분야 협력이 의미가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안규백 국회 국방위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이 영상정보에서는 우리보다 앞설 수 있지만 (다른) 모든 정보에선 우리가 앞서 있다. 영상정보도 미국 측으로부터 실시간 받아보기 때문에 일본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