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 최고였던 아재들, 예능판 ‘들었다 놨다’

입력 2019-08-05 04:02
JTBC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 출연하고 있는 스포츠 스타와 방송인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허재 김용만 안정환 이만기 김성주 김동현 양준혁 이봉주 여홍철 정형돈 심권호. JTBC 제공

이 남자, 한때는 농구 코트를 호령한 특급 스타였다. 농구대잔치에서 우승 트로피를 일곱 번이나 들어 올리며 1980, 90년대 농구 열풍의 끌차 역할을 했다. 과거 남자를 소개한 기사에는 ‘농구 대통령’ ‘농구 9단’ ‘농구 천재’ 같은 문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남자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달라졌다. 바로 ‘예능 신생아’. 그는 왕년의 스포츠 스타를 모아 오합지졸 조기축구팀을 꾸린 ‘뭉쳐야 찬다’(JTBC)에서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축구를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기고, 짜증내고,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로부터 호감을 사고 있다는 뜻이다. 이 남자는 바로 농구스타 허재다.

이 프로그램에는 허재 외에도 이만기(씨름) 양준혁(야구) 이봉주(마라톤) 심권호(레슬링) 등 내로라하는 스타가 대거 출연한다. 김성주 김용만 정형돈 같은 ‘프로 방송인’이 거들고 있긴 하지만 프로그램 인기를 견인하는 건 한때 최고였고, 지금은 ‘아재’인 스포츠 스타들이다. 매주 목요일 밤 11시에 방영되는 ‘뭉쳐야 찬다’는 매회 4% 수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다. 방송가 안팎에서는 최근 등장한 가장 참신한 프로그램이라는 호평도 쏟아지는 분위기다.

특이한 건 이른바 스포테이너(스포츠 스타+엔터테이너)의 활약이 이 프로그램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천하장사 출신으로 ‘국민 MC’ 반열에 오른 강호동, ‘국보 센터’라는 칭호가 붙는 서장훈 외에도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종횡무진 휘저으며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스포테이너 중 한 명은 이종격투기 선수 김동현이다. 그는 올해 들어서만 ‘대탈출 2’ ‘플레이어’(이상 tvN) ‘정글의 법칙’(SBS) ‘팔아야 귀국’(채널A) 등에 출연하며 방송가 블루칩으로 거듭났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스포츠 스타들은 방송에서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김동현이 가장 눈에 띈다”고 말했다. 김동현 외에도 농구 스타 현주엽은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KBS2)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배구 여제’ 김연경은 틈틈이 ‘나 혼자 산다’(MBC)에 출연해 털털한 매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송가에서 스포테이너가 각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스포츠 선수는 다른 직종에 비해 은퇴가 빠른 편인데, 은퇴 이후에 활동할 수 있는 무대 중 하나가 방송”이라며 “인지도가 높은 만큼 시청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방송가의 달라진 트렌드에 주목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관찰 예능이 인기를 끌면서 ‘예능감’이 없더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화제가 되곤 한다”며 “연예인만 예능에 출연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는 만큼 스포테이너의 활약은 앞으로 더 두드러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