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전장에 끌려와 총을 들고 서 있는 기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장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했다. 왜 하필 지금 어려움을 겪으면서 저 산을 넘어야 하는 걸까. “아니, 아베 신조 일당이 우리의 외교적 해결 제안을 계속 거부하고 보복을 강행해 전투가 벌어진 것 아니냐. 내부 총질 그만하라”고 분노를 토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아베 정권이 작정하고 우리의 아픈 곳을 찔러대며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틀림없다. 다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기 전에 왜 미리 막지 못했느냐는 원망을 말하고 싶다. 어떻게든 국민을 편안케 하는 게 정부의 임무 아닌가.
상대의 부당한 공격을 막을 시간과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해 아베 정권이 화를 내든 말든 방치했다. 특사를 보내 설득해봤다지만 일본이 보복을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사법부의 판단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은 알겠다. 징용 배상은 한·일 최고법원의 판단이 다르게 나온 사안이다. 그렇다면 이걸 제3국 중재위원회나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 시비를 따져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우리의 정의와 일본의 부정의를 국제사회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기회 아닌가. 중재위나 ICJ 환경이 우리에게 불공정할 것 같아서 못 간다면 도대체 공정한 곳은 어디인가.
정부는 징용 배상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대일 관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일본과 잘 지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인하는 일본이 밉고, 한층 우경화된 일본이 거슬리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걸리적거리는 일본이 싫고, 우리에게 일본이 갖는 중요성도 여러 측면에서 떨어졌다고 여겨서 그랬을 듯싶다.
최근 여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은 한·일 갈등 사태가 내년 총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평가한 보고서를 냈다. 이걸 보면 집권 세력이 사태를 오히려 더 키우고 싶어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든다. ‘반일’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는 나라에서 그야말로 전 국민을 반일로 불타오르게 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지금 와서 정부 욕하는 건 이적 행위다. 불만이 있어도 닥치고 일치단결해서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싸움에서 이길 것 아니냐”는 호통도 쏟아질 것 같다. 지난 2월 ‘주적은 이제 일본뿐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이제 주적은 확실히 일본이 됐다. 7월 일본의 첫 보복 직전에 쓴 칼럼 제목은 ‘지나간 세대의 마지막 결투’였다. 그 결투도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말았다. 그런데 정부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결투에 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총, 균, 쇠’라는 책으로 유명한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는 최근작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에서 국가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된 12가지 요인 중 하나로 ‘국가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자기평가’를 들면서 일본을 사례로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 일본은 ‘증오스러운 야만인이 나보다 강하고 그들에게 배워야 강해질 수 있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인정하고 서구에게 배워서 강해졌다. 그러나 1930~40년대 일본은 메이지 시대와 달리 자기평가를 정직하고 신중하게 하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일으킨 전쟁에서 패망했다.
“왜 열등감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의 능력을 비하하냐. 일본에 전혀 꿀릴 것 없고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린다. 국가적 자존심과 자신감은 물론 중요하다. 기대한 대로 선한 자가 승리하고 악당이 응징을 받는 결말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혹시라도 우리의 자기평가가 현실적이지 않았던 탓에 그런 해피엔딩에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하나. 피해가 막심한 결과 말이다. 그때 가서는 “국가적 자존심을 세우고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가치 있는 싸움이었다”고 ‘정신승리’해야 하는 건가. 나는 수년, 수십년 후 정말 자립적이고 민족정기가 바로 세워진 조국보다 지금 당장 무탈한 나라를 원한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